반도체는 한국경제의 샘물같은 존재
자본과 인재 모이는건 자연스러우나
의존 깊을수록 외부경제에 취약 우려
아프리카 사바나의 건기가 깊어지면 동물들은 물이 남아 있는 몇 안 되는 웅덩이로 모여든다. 영어로 워터링홀(Watering Hole)이라 부르는 곳이다. 물을 찾아온 코끼리와 얼룩말, 영양이 좁은 웅덩이를 함께 차지한다. 이곳은 생명을 이어 주는 공간이지만 동시에 위험이 집중되는 공간이기도 하다. 물이 마르거나 포식자가 나타나면 그 충격은 한곳에 모인 동물들에게 한꺼번에 닥치기 때문이다.
오늘날 우리 경제에도 워터링홀이 있다. 바로 반도체 산업이다. 세계적인 AI 투자 확대에 힘입어 반도체 수출이 빠르게 증가하면서 경상수지 흑자가 확대되고 기업실적도 개선되고 있다. 최근 발표된 국제통화기금의 세계경제전망 자료에 따르면, 우리나라 잠재성장률은 올해 2%대를 회복하고 내년에도 상승할 것으로 전망된다.
워터링홀은 물이 귀할수록 그 가치가 커진다. 이 점에서 최근 반도체 산업의 성장은 각별한 의미가 있다. 인구구조 변화와 생산성 둔화로 잠재성장률이 지속적으로 하락하는 가운데, 한국 경제에서는 새로운 성장동력을 찾기 어렵다는 우려가 깊어져 왔다. 이러한 시기에 찾아온 반도체 호황은 오랜 가뭄 끝에 내린 단비와 같은 희소식임이 분명하다. 세계적인 기술혁신의 중심에 우리 제조기업들이 자리하고 있다는 사실은 한국 경제에 여전히 새로운 성장의 기회가 열려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한곳에 물이 풍부하다고 초원 전체가 푸르러지는 것은 아니다. 수출과 생산은 활기를 띠고 있지만, 상당수 가계가 체감하는 소득 여건은 그만큼 빠르게 개선되지 않고 있다. 반도체를 중심으로 한 일부 산업의 호황과 경제 전반의 회복 사이에 간극이 존재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간극은 반도체 산업의 특성과도 관련이 있다. 반도체는 기술과 자본이 집약된 산업으로, 생산이 크게 늘더라도 고용과 가계소득이 같은 속도로 증가하기는 어렵다. 그렇다고 높은 생산성에 기초한 성장을 문제 삼을 이유는 없다. 오히려 우리 경제가 지향해야 할 방향이다. 중요한 것은 성장의 크기만이 아니라 그 성과가 다른 산업과 가계에 얼마나 확산되느냐이다.
워터링홀에 동물들이 모여들 듯이 경쟁력 있는 산업에 자본과 인재가 집중되는 것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기술과 기업이 한곳에 모이면 집적의 이익이 발생하고 혁신도 빨라진다. 그러나 워터링홀 하나에 대한 의존이 깊어질수록 외부환경 변화에 취약해진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지금의 호황은 우리 기업의 경쟁력이 만들어 낸 성과이지만 글로벌 AI 투자 사이클에도 크게 좌우된다. 세계적인 AI 투자 열기가 식거나 기술 방향이 달라지면 우리 경제가 받게 될 충격이 작지 않을 것이다. 호황기에야말로 호황이 지속될 것이라는 낙관을 경계해야 하는 이유이다.
그렇다면 무엇을 해야 할까. 이제는 풍부해진 물이 경제 곳곳으로 흐르도록 물길을 내야 한다. 반도체 투자가 국내 소재·부품·장비 기업의 기술력을 높이고, AI가 제조업과 서비스업의 생산성을 개선하며, 그 성과가 고용과 소득, 소비 확대로 이어져야 한다. 이를 막연한 낙수효과에만 맡길 수는 없다. 정부가 해야 할 일은 산업 간 기술 확산의 장벽을 낮추고 교육과 연구개발, 인프라와 경쟁환경을 개선하여 민간이 새로운 성장의 샘을 발견하도록 돕는 일이다. 특히 중소기업의 AI 활용 역량을 높여 성장의 성과가 경제 전반으로 확산되도록 해야 한다. 그럴 때 비로소 일시적인 경기 상승이 지속가능한 성장으로 바뀔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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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장동력이 희소해지는 시대에 세계적인 반도체 경쟁력을 확보한 것은 한국 경제의 소중한 자산이다. 그러나 워터링홀이 아무리 풍부해도 그 물에만 의존하는 초원은 지속가능하지 않다. 어렵게 찾아온 성장의 기회를 최대한 활용하면서 그 성과를 새로운 성장동력으로 이어가야 한다. 한국 경제의 미래는 워터링홀의 크기뿐 아니라 그 물길이 얼마나 넓고 멀리 뻗어 나가고, 새로운 워터링홀이 얼마나 생겨나느냐에 달려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