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영수 특검이 얘기한 ‘세기의 재판’이 오늘(7일) 열린다. ‘박근혜 정부의 최순실 등 민간인에 의한 국정농단 의혹 사건’에 연루돼 구속·기소된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의 재판이다. 이 재판은 시작도 전에 승부가 나 있는 것과 같다.
‘선(善)’과 ‘악(惡)’의 프레임 설정이 끝나서다. 법정 내에서 아무리 무죄를 주장해도 법정 밖의 또 하나의 법정인 ‘여론 법정’에서는 이미 유죄가 내려진 상태다.
지난해 12월 21일 특검 출범 당시 “뇌물죄를 적용하는 정공법을 택하겠다”는 박 특검의 취임 일성에서 여론재판의 승패는 결정난 듯하다. 조사도 하기 전에 뇌물이라는 ‘프레임’을 공개적으로 선언하는 것은 특검이 여론전이 될 수밖에 없다는 점을 간파한 노림수로 보인다.
미국 연방검사 출신의 저명한 변호사인 켄들 코피의 책 ‘여론과 법, 정의의 다툼’(SPINNING THE LAW: 권오창 변호사 옮김)에는 이런 대한민국의 현 상황을 꿰뚫는 대목들이 눈에 띈다.
그는 ‘여론의 법정’에서는 일반 법정에서의 증거우선주의와 무죄추정의 원칙은 무시되며, 심증우선주의와 유죄추정이 지배한다는 점을 강조했다. 또 한번 재판을 받은 죄를 두 번 묻지 않는 일사부재리의 원칙도 지켜지지 않는다고 했다. 여론법정에선 누가 프레임 전쟁에서 승리하는가가 ‘팩트(사실) 논쟁’보다 훨씬 더 중요하다고 했다.
이번 뇌물죄는 이재용으로의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라는 전제하에, 최순실 등에 뇌물을 제공했다는 게 피의사실의 핵심이다. 그런데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라는 대전제의 사실확인은 특검 조사나 언론들의 검증 과정에서는 없었다.
‘가진 자가 더 가지려 했다’는 전제는 검증의 필요 없이 이미 여론 법정에서 유죄였다. 경영권 승계와 무관하게 정치권력의 힘에 못 이겨 어쩔 수 없었다는 항변은 핑계로 치부돼 여론법정의 증거에서 배제됐다.
경영권(헌법상 노동권에 상대적 개념일 뿐 법률적 용어는 아니다)의 정확한 정의가 부재하긴 하지만, 필요한 일정 지분확보가 경영권 승계라면 1996년 에버랜드 CB(전환사채) 발행시 삼성의 승계는 끝났다. 아는 사람은 다 아는 사실이다.
또 경영권 승계가 ‘지분 51% 이상을 갖는 것’이라면, 삼성물산과 제일모직을 아무리 붙였다가 뗐다가 해도 불가능하다.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이 50%를 넘기 때문이다. 이는 ‘최순실 위의 그 누구’라도 도울 방법이 없다. 하지만 여론법정에선 이런 사실과 계산은 무시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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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영권승계 문제는 1996년 CB 발행 후 십수년간의 소송 과정 끝에 2012년 유무죄가 법정에서 가려졌다. 이건희 삼성 회장과 이재용 부회장은 8000억원을 사회에 헌납했다. 하지만 ‘여론의 법정’에서는 공소시효도, 일사부재리의 원칙도 소용없다. 과거는 잊혀졌고, 또 다시 ‘경영권 승계를 목적으로’라는 프레임에 갇혀 뇌물죄에 몰렸다.
최근 일각에선 이재용 부회장에게 어머니인 홍라희 리움미술관장을 관장직에서 내친 ‘패륜의 프레임’까지 씌워졌다. 부도덕 프레임은 여론재판에선 치명적이다. 실제 두 모자의 불화를 목격한 사람이 있을까. 그랬을 것 같지는 않다.
2년여 전 어느 날 저녁, 기자가 삼성전자 서초사옥 로비에서 우연히 만난 홍 관장과 이 부회장은 여느 가정의 모자와 다름없는 다정한 모습이었다. 홍 관장은 여느 어머니와 마찬가지로 습관처럼 “(아들을) 잘 부탁한다”는 당부의 말을 했다.
이게 눈으로 확인된 팩트지만 이런 사실은 여론의 법정에서는 중요하지 않다. 더 자극적인 뉴스가 여론의 법정에서는 효과를 얻기 때문이다. 여론법정이 득세하면 마녀사냥식 여론재판은 중세보다도 더 횡행해질 것이고, 우리 사회의 위험지수는 더 높아질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