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럴 거면 한국에도 투표권을 줬어야지 않습니까."
지난해 미국 특파원에 내정되고 얼마 있다가 몇몇 지인들과 함께한 환송자리에서 한 취재원이 꺼냈던 얘기다.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이 압도적인 표차로 백악관 복귀를 확정한 뒤 당선인 신분으로 연일 '아메리카 퍼스트'(America First·미국 우선주의)를 예고하던 시기였다. 전 세계에 트럼프 대통령만큼 영향을 미치는 사람을 뽑는 선거라면 우리에게도 투표권을 줘야 하지 않느냐는 게 그의 얘기였다.
글로벌 산업 현장에서 잔뼈가 굵은 그에게 4년 만의 트럼프 귀환은 결코 달갑지 않은 사건이었던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집권 1기였던 2018년 2월 한국산 세탁기에 20~50% 관세를 부과하는 세이프가드(긴급수입제한조치)로 국내 가전업계를 괴롭혔다. 같은 해 3월엔 한미 FTA(자유무역협정) 재협상을 요구해 우리 정부로부터 미국산 자동차 쿼터(수입할당량)를 확대하는 '양보'를 받아냈다.
농반진반의 투표권 얘기로 그날 좌중을 한바탕 웃겼지만 실상은 막막함을 감추지 못했던 그의 표정이 아직도 눈에 선하다.
백악관 집무실에 돌아온 트럼프 대통령이 지난 5개월 동안 보인 행보는 그날의 우려대로 4년 전 당시를 훌쩍 뛰어넘는다. "미국의 황금시대는 이제 시작된다." "미국이 더는 이용당하는 일이 없도록 하겠다." 시작을 알리는 취임 일성부터 국제사회에 던지는 경고에 가까웠다.
지난 4월 발표한 상호관세는 트럼프 시대로 대변되는 국제질서의 변화를 극명하게 알리는 절정의 무대였다. 트럼프 대통령은 앞으로 미국에서 물건을 팔려면 높은 관세를 감내하든가 미국에 공장을 짓고 생산하라는 선택지를 던졌다. 전임 조 바이든 정부 당시 우대받았던 동맹이나 우호국도 예외가 아니다. 캐나다나 멕시코 같은 이웃 우방국은 상호관세 발표 전에 이미 첫 관세의 타깃이 됐다. 한국 역시 상호관세의 무풍지대가 아니다.
이달 들어 중동에서 벌어지는 이스라엘과 이란의 무력충돌, 3년을 넘어선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전쟁을 대하는 트럼프 행정부의 태도는 이익과 거래, 양자주의로의 회귀를 여실히 보여준다. 한때 이념과 규범, 다자주의의 시대를 주도했던 미국은 아득히 먼 옛 이야기가 됐다. 유엔총회에서 미국이 러시아, 북한, 벨라루스, 수단과 함께 러시아 규탄 결의안에 반대표를 던지는 모습이 더는 낯설지 않은 장면이 됐다. 이젠 전통적 동맹의 가치보다 개별 사안에서 미국의 이익에 얼마나 부합하느냐는 이익형량이 미국의 결정을 이끌어내는 척도다.
4년 만에 뒤집힌 국제질서를 대하는 각국 정부가 우왕좌왕하는 것도 이해 못할 일이 아니다. 제각각 속내가 복잡할 수밖에 없다. 유럽, 아시아, 북미가 모두 내키지 않는 주판알을 두드리느라 정신이 없다. 좀처럼 가진 패를 드러내지 않고 수시로 말을 바꾸는 '거래의 달인'이 상대라 더 그렇다.
국제사회의 변곡점에서 반년 동안의 리더십 공백 끝에 출범한 이재명 정부의 발걸음이 유난히 바쁜 이유도 여기 있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11일 상호관세 협상을 멈추고 2주 안에 한국을 비롯한 협상국에 원하는 조건을 통보하겠다고 '시한폭탄'을 던졌다. '줄라이 패키지'를 준비해 일괄타결 협상을 준비했던 우리 정부로선 더없이 당혹스러운 상황이다. 주한미군 감축이나 역할 조정 같은 워싱턴발(發) 청구서도 지난 6개월치 이자까지 붙어 줄지어 날아들 기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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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명 대통령은 대선 기간 미국 주간지 타임과 인터뷰에서 '중국이 대만을 침공하면 대만을 돕겠느냐'는 질문에 "외계인이 지구를 침공하려 하면 그때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벌어지지 않을 일을 가정하지 말자는 점에서 우문현답이라 할 만하다. 다만 트럼프 시대 들어 경제·통상·외교·안보에서 '언제든 외계인이 침공하는 상황'을 배제할 수 없게 됐다는 점도 짚고 넘어갈 부분이다. 어설픈 이념도, 무정한 거래도 모범답안이긴 쉽지 않게 됐다. 이재명식 실용외교가 무엇인지 증명할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