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시평]AI 시대, 서사가 돈이 된다

[MT시평]AI 시대, 서사가 돈이 된다

정나영 앤와이 컨설팅 대표
2026.03.26 02:00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타이틀이 17년간 하지 못한 일을 영화 한 편이 해냈다. '왕과 사는 남자' 개봉 후 경기 남양주 사릉을 찾는 발길이 두 배 늘었다.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인 것은 문화재 지정도, 지자체의 관광 마케팅도 아니었다. 500년 전 정순왕후가 세조의 회유를 거부하고 염색 노동으로 생계를 이어가며 남편 단종이 묻힌 영월을 바라본 60년의 그리움이었다. 사람들은 문화재가 아닌 사연의 현장을 찾는다. AI 기술이 평준화될수록 진짜 돈은 서사(敍事)의 희소성에서 나온다. 기술은 복제할 수 있지만 사연은 복제되지 않는다.

오동하 감독의 '제로(Zero)'는 지난해 할리우드 AI 국제영화제 4관왕에 이어 도쿄 AI 영화제까지 석권했다. AI 소설가에 밀린 인간 창작자의 고뇌를 가장 인간적 서사로 승화시킨 결과다. 오 감독은 고교 시절부터 쓴 100여 편의 시나리오를 생전에 다 찍지 못할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AI는 서랍 속 꿈을 현실로 끌어냈다. 하이데거는 도구가 완벽히 기능할 때 의식에서 사라진다고 말했다. AI 기술이 범용재로 향하는 지금, 소비자의 시선은 인간의 서사에 머문다.

비즈니스도 다르지 않다. 스토리의 설득력이 시장을 움직인다. 아마존의 경고에 아라빈드 스리니바스 퍼플렉시티 CEO가 '괴롭힘은 혁신이 아니다'라고 맞섰을 때 AI 커머스 전쟁은 다윗과 골리앗의 서사로 바뀌었다. 팔란티어 CEO 알렉스 카프가 성수동 팝업스토어에 나타났을 때 현장은 팬미팅을 방불케 했다. 솔루션 설명 열 마디보다 '신념을 지킨다'는 한 줄이 서학개미를 움직였다. 서학개미의 팔란티어 투자액은 2년 만에 56억 달러로 10배 이상, 보유 순위는 21위에서 4위로 상승했다.

AI가 전장에 투입됐다. 다리오 아모데이 앤트로픽 CEO는 미국 정부의 압박 속에서도 자사 AI 모델 클로드를 자율무기와 대규모 감시에 쓰지 않겠다는 '레드라인'을 고수했다. 그 대가로 2억 달러 규모의 계약을 잃었지만 '인간의 존엄을 우선하는 AI'라는 서사를 대신 얻었다. 클로드는 미국 앱스토어 무료 앱 1위에 오른 데 이어 현재 엔터프라이즈·코딩 시장에서 빠르게 성장 중이다.

기술이 서사와 불협화음을 낼 때 브랜드는 혁신의 상징이 아니라 뭇매의 대상이 된다. 올해 밀라노 패션위크를 앞두고 구찌가 공개한 AI 화보는 'AI 슬롭(Slop·찌꺼기)'이란 오명을 얻었다. BBC에 따르면 인간의 창의성과 이탈리아 장인정신을 핵심 서사로 내세워 온 105년 전통의 럭셔리 하우스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반면 AI를 '싼맛 특수효과'라고 폄하하는 시선 속에서 윤승림 감독은 AI를 과감히 활용해 신인 그룹 올데이 프로젝트의 데뷔곡 'FAMOUS' 뮤직비디오를 만들었다. AI 효과가 각 멤버의 데뷔 서사를 강화하며 현재 조회 수 6천만회를 앞두고 있다.

AI 전환기, 기술 경쟁력은 필요조건일 뿐이다. 오히려 대중의 공감을 끌어내는 스토리텔링 역량이 차이를 만든다. AI가 생산과 창작의 문턱을 낮출수록 시장의 답은 명백하다. 여전히 인간적인 이야기에 기꺼이 더 높은 프리미엄을 지불한다. AI 시대가 성숙해질수록 지능보다 매력적인 서사가 돈이 된다.

정나영 앤와이 컨설팅 대표

정나영 앤와이 컨설팅 대표
정나영 앤와이 컨설팅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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