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초대석
혁신, 도전, 소통, 전문성으로 대한민국 각계 리더들의 성장과 변화를 조명합니다. 과학, 금융, 교육, 공공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전하는 경험과 비전,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력을 소개합니다.
혁신, 도전, 소통, 전문성으로 대한민국 각계 리더들의 성장과 변화를 조명합니다. 과학, 금융, 교육, 공공 등 다양한 분야의 인물들이 전하는 경험과 비전, 그리고 사회에 미치는 긍정적 영향력을 소개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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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의 이름과 강의 내용이 너무 달라 당황스러웠습니다.” 페이스 북을 통해 김형률 교수의 수업을 듣는 학생들에게 평가를 부탁했다. 새 학기가 시작된 지 일주일 밖에 되지 않아 ‘과연 학생들이 평가를 제대로 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 앞섰지만 밑져야 본전이지 않은가. 의외로 반응은 몇 가지로 요약됐다. ‘당황스럽다’와 ‘신선하다’는 의견이 가장 많았고 ‘많은 것을 배울 수 있을 것 같다’는 기대감을 나타낸 학생도 상당수였다. 그는 숙명여대에서 20년 가까이 역사를 가르치고 있다. 그런데 첫 수업시간부터 다양한 멀티미디어가 등장한다. 코세라(www.coursera.org) 같은 해외 석학들의 강의를 무료로 들을 수 있는 사이트에 쉴 새 없이 접속해 참고할만한 강의 목록을 알려준다.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방식으로 수업이 진행되다 보니 학생들이 당황하는 것은 당연한 결과다. 그는 3학점 강의의 경우 1주일에 2시간은 직접 수업을 하고 나머지 1시간은 같은 분야를 연구하는 세계 석학들의 강
“지금 미래창조과학부 때문에 많은 논란이 제기되고 있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빠져 있는 것 같습니다. 창조는 결국 사람이 하는 것이고 싱크 탱크가 아니라 싱크 탱크가 나올 수 있는 인프라를 만드는 것이 미래창조부의 핵심입니다.” 지난 7일 만난 김형률(56) 숙명여대 역사문화학과 교수의 말이다. 교육 현장 최일선에서 20년 가까이 학생들을 가르쳐온 터라 말의 무게감이 남다르다. 그럼 싱크 탱크가 나올 수 있는 인프라는 어떤 것을 말하는 것일까. 김 교수는 “지식을 축적하고 유통하며, 토론하고 재생산할 수 있는 허브를 하루 빨리 구축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미국의 하버드나 MIT, 프린스턴, 영국의 옥스퍼드와 같은 세계적 대학들이 앞 다퉈 무료온라인 공개강좌(무크, Massive Open Online Course)를 개설하고 있는 움직임에 주목해야 한다"는 지적이다. “코세라(Coursera)나 에덱스(edX), 유다시티(udacity) 같은 온라인 무료 강의를 통해 전 세계에서 하루
"중산층 육성이 뜬 구름 잡는 화두가 아닙니다. 주식 투자자들이 모두 중산층입니다. 자본시장이 튼튼해지는 것이 든든한 중산층 확보를 위한 첩경일 수밖에 없습니다." 지난 19일 서울 여의도 사무실에서 만난 김형태 자본시장연구원장(51·사진)은 자본시장을 주식을 매매하는 곳으로 보는 시각에 섭섭함을 내비쳤다. 새 정부가 화두로 제시한 중소기업 활성화나 중산층 육성 등의 해법을 제시해 줄 자본시장이 홀대를 받고 있는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다. 금융투자업계는 거래대금 급감으로 유례없는 혹한기를 맞고 있다. 벤처기업 전용 주식시장인 코넥스(KONEX) 신설, 대형 투자은행(IB) 육성 등을 골자로 한 자본시장법 개정안은 번번이 뒷전으로 밀렸다. 다행히 새 정부가 이를 국정 과제로 채택해 기대감은 가질 수 있게 됐다. - 자본시장법 개정안이 이명박 정부에선 국회의 벽을 넘지 못했습니다.(김 원장을 만난 19일 국회 정무위 법안심사소위는 개정안을 심의조차 못해 다음 임시국회에서 다시 다뤄지게 됐
증권사, 금융투자협회 및 한국거래소 등 유관기관의 출자로 설립된 자본시장연구원은 현재 박사급 인력만 30명이 넘는다. 지난 97년 증권연구원으로 출범했을 때에 비하면 배 이상 늘었다. 연구의 지평도 크게 확대됐다. 지난 2009년 2월 자본시장법 시행에 맞춰 자본시장연구원으로 확대·개편되면서 외환, 파생, 금융제도 등에 대한 연구가 추가됐다. 특히 연구원은 자본시장에 관한 선제적인 연구를 진행해 자본시장법 제정에 힘을 보탰다. 우수한 인재들도 연구원으로 몰려들고 있다. 연구원 관계자는 "최근 해외 유수대학 출신의 박사급 70명이 지원을 했는데 그 중 8명만 서류전형을 통과했다"고 귀 뜸했다. 사실 이런 성장에 김형태 원장의 노력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중국사회과학원 금융연구소와 양해각서(MOU) 체결을 추진했고 국제통화기금(IMF), 세계은행, 아시아개발은행(ADB) 등 국제 금융기구와의 협력 관계도 다졌다. 김 원장은 파생상품실과 펀드·연금실을 신설하는 등 자본시장연구원을 '국가
김기석 로만손 사장은 창업주인 김기문 대표이사 사장(현 중소기업중앙회 회장)의 막내 동생이다. 로만손이 1988년 4월 설립됐고 김 사장이 1989년 1월 입사했으니 사실상 형제가 함께 창업한 셈이다. 김 사장은 입사 6년차인 1994년부터 시계부문 국내영업본부장을 맡았다. 어깨 너머로 형의 사업수완을 익혔고 중요한 순간마다 "나라면 이렇게 결정하겠다"라고 시뮬레이션을 거듭하며 경영 내공을 차곡차곡 쌓았다. 2002년 그에게 기회가 찾아왔다. 정체된 시계사업의 대안으로 주얼리 사업을 추진하게 된 것이다. 브랜드 콘셉트를 찾아 한달에 수차례씩 이탈리아 비행기에 몸을 싣고, 왕가의 생활상을 이해하기 위해 수많은 역사책을 뒤지며 어려운 브랜드 론칭 작업을 김 사장이 진두지휘했다. 주얼리와 핸드백을 합쳐 연매출 1000억원대 브랜드로 성장한 제이에스티나는 김 사장의 경영 데뷔작이자 성공작인 것이다. 김 사장은 2007년 최고경영자(CEO)로 정식 취임한 이후 로만손의 몸집을 3배 이상 키
백화점서 고급 모델 '아트락스' 내놓자마자 '완판' 70개국 年 2500만弗 수출, 주얼리·핸드백도 대박 국산 시계가 각광받던 호시절이 있었다. 1980년대 초·중반 얘기다. TV나 라디오 뉴스에 앞서 "OO시계가 O시를 알려드립니다"라는 시보 광고가 등장할 정도로 시계 브랜드의 영향력이 막강했다. 삼성, 아남, 한독 등 대기업들이 너도나도 시계 사업에 뛰어들었다. '오리엔트 갤럭시, '삼성 돌체' 등은 결혼 필수 예물이었고 최고의 졸업·입학 선물이었다. 1980년대말 시계 수입이 자유화되면서 시장이 급변했다. 고가의 수입 브랜드들이 '물좋은' 예물 시계시장을 석권했다. 중저가 시장은 중국산 제품에 자리를 내줬다. 갈 곳을 잃은 국산 시계 브랜드들은 매출 감소세를 지속하다 줄줄이 자취를 감췄다. 그 와중에서도 살아남아 대한민국 시계 자존심을 지켜주는 국산 브랜드가 있다. 바로 로만손이다. 1988년 창업당시 대기업 공세에 밀려 중동 수출로 활로를 찾아야했던 기업었지만 이제 100만원
한글과컴퓨터(한컴)가 변했다. 매출이 400억원에서 2년새 650억원대로 껑충 뛰었다. 노트북PC 등 '박스 유통'을 없앤 순수 SW 판매만의 '진성매출'이다. 37%의 영업이익은 더욱 놀라운 수치다. 하지만 이 조차 외형이다. TV에 개발자 구인광고를 내도 지원하지 않던 회사. 경영권 분쟁을 거치며 조직에 몸담고 있는 게 부끄러워 하나 둘 떠난 기업. 한컴에선 미래를 찾을 수 없다는 분위기였다. 상황은 역전됐다. 이제는 우수한 개발자들이 한컴을 찾는다. 10대 1 미만이던 채용 경쟁률은 55대 1이 됐다. 개발자만 30대 1 수준이다. 한컴 개발자들은 작년에 연차, 직급에 관계없이 스톡옵션을 받았다. 한컴에선 개발자가 '왕'이다. 이런 변화의 중심엔 이홍구 대표가 있다. 시쳇말로 '다국적IT기업에서 박스 장사가 몸에 밴' 그가 한국을 대표하는 SW 기업 CEO가 됐을 때, 주변의 시선이 반신반의였던 게 사실이다. 다국적 IT기업 국내 지사에서도 놀라울만한 실적을 보이며 승승장구했던
사장(사진)은 월가가 좋아하는 CEO다. 통역을 쓰지 않고 바로 영어로 실적 프리젠테이션을 하기 때문이다. 그가 토종 CEO로서 보기 드문 영어능통자가 된데는 사연이 있다. 어릴때부터 그는 영어에 이끌렸다. 소년 시절에는 신작로를 오가며 영어 단어를 달달 외웠고, 대학에서는 영어영문학을 전공했다. 1980년 과외금지령이 내려지기 전까지는 2000~3000명의 수강생을 거느린 스타 영어강사로 명성을 날렸다. 영어 강사를 관둔 후에는 곧바로 1979년에 따놓은 자격증을 가지고 고려여행사 관광통역 안내원이 됐다. 그 이전에 우연히 한국인이 유창한 영어로 외국인에게 경복궁을 안내하는 모습을 보고 멋있다고 여겼던 것이 관광안내원 자격증을 딴 계기였다. 1983년 기능올림픽 관광경진대회 영어부문에서 금메달도 땄다. 관광안내원 생활을 하면서 그는 문화재에 배인 역사와 문화에 대한 공부를 병행해 깊이있는 '스토리텔링'으로 관광객을 사로잡았다. 당시 소속돼 있던 고려여행사에서 실력을 인정 받았고,
“돈이 있고 시간이 있으면 무엇을 하고 싶은가?”라고 질문했을 때 사람들은 흔히 ‘여행’을 꼽는다. 불황에 대형마트 매출조차 감소할 정도로 너도 나도 지갑을 닫는 추세지만 여행만큼은 예외다. 관광공사에 따르면 지난해 해외 출국자는 전년도에 비해 7.5%늘어난 1360만명 안팎으로 추정된다. 2007년 1330만명을 능가하는 사상최대규모다. 또 국토해양부에 따르면 지난해 항공교통량은 55만1744대로 2011년(51만3922대)보다 7.4% 늘었다. 역시 사상최대치다. 이같은 현상에 대해 홍기정 모두투어 사장(60·사진)은 '힐링' 욕구로 진단했다. 각박해진 세상살이 속에 주5일제가 정착되며 일이 주는 스트레스를 털고 마음의 휴식을 찾으려는 웰빙수요가 늘고 있다는 것이 그의 생각이다. 그같은 추세속에서 항공업체와 여행업계는 '붐'을 누리고 있다. 지난해 모두투어의 패키지여행 송객인원은 93만명으로 전년대비 11.2%, 매출액은 1306억원으로 7.9%가 증가했다. 올 1월에는 창립이래
최기의 KB국민카드 사장이 지난 1990년 주택은행 부산·경남지역본부에서 대리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당시 주택청약에 대한 일반인들의 관심은 상당히 뜨거웠다. 수많은 사람들이 은행 지점을 방문해 주택청약에 대한 궁금증을 호소했다. 은행 업무가 마비될 정도였다. 최 사장은 그 때 아이디어를 냈다. 라디오를 활용하자는 생각이었다. 라디오에 출연해 주택청약에 대한 궁금증을 풀어주면 수많은 사람들이 은행을 방문하는 수고를 덜어줄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최 사장은 당장 부산KBS를 찾아갔다. 하지만 담당 라디오PD는 회의적이었다. 통할 수 있는 아이템이 아니라는 이유에서였다. 하지만 최 사장은 포기하지 않았다. 부산KBS도 최 사장의 집념에 반신반의하며 코너를 맡겼다. 초조한 마음으로 시작된 첫 방송. '과연 전화가 올까?'란 걱정은 기우였다. 첫 방송부터 전화가 폭주했다. 통하지 않을 것 같았던 아이템은 소위 '대박'이 났다. 이 소식은 서울 본사에까지 전달됐다. 최 사장은 이 일을
KB국민카드는 지난해 그 어느 카드사보다 바쁜 한 해를 보냈다. 격변하는 시장 환경에 맞서 시장 점유율을 유지해야했고 그동안 공언했던 체크카드 1위도 수성해야했다. 시장의 평가는 대체로 우호적이었다. 지난 2011년 3월 분사 이후 빠른 시기에 시장 점유율을 끌어올리면서 경쟁력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고객 평가도 대체로 긍정적이었다. 하지만 분사 2주년을 맞이하는 올해 시장 환경은 더욱 악화됐다. 카드 수수료율 개편 등으로 카드사의 수익감소는 불가피한 상황이다. 대다수의 카드사들은 올해를 '위기 상황'으로 규정하고 있다. KB국민카드 역시 마찬가지다. 대내외 변수에 맞서 새로운 경쟁력 확보에 나서야 할 시점이다. 이에 대한 최기의 KB국민카드 사장의 경영전략은 명료하다. "시장 잠재력은 유지하면서 비용 구조조정을 통해 수익을 지켜야 한다"는 것. 실제로 KB국민카드는 마케팅 비용에 대한 개편작업에 나서고 있다. 현재 관련 태스크포스(TF)팀도 운영 중이다. 최 사장은 "마케팅 효율을
흔히 공무원 출신의 국회의원이나 기관장을 얘기할 때 '정통관료', '행정전문가'라는 수식어를 붙이는 경우가 있다. 중앙부처 5급 행정사무관으로 출발해 20여 년 넘게 공무원 생활을 하면서 1급(실장)이나 차관을 거쳐 '졸업'한 이들에게 주로 붙는 호칭이다. 이기주 KISA(한국인터넷진흥원) 신임 원장(사진)에게도 그런 호칭이 붙는다. 옛 정보통신부 공보관 시절, 쓴 소리를 내뱉던 기자들 중 그와 20분만 얘기하고 나면 고개를 절로 저으며 "못당한다"는 얘기가 나올 정도로 논리 정연하다는 평가를 받았다. 얼굴 하나 붉히지 않으면서 조곤조곤 할 얘기 다 하고, 기자들의 오해를 이해로 바꾸는 재주꾼. 그가 이제는 방송통신위원회 산하기관인 KISA를 책임지는 자리로 다시 공직으로 돌아왔다. 방통위 퇴직 후 2년여 만이다. 법률사무소 고문으로 1년 여간 몸담았던 그는 "보호막 없는 민간기업의 생존경쟁을 뼈저리게 느꼈다"고 말한다. KISA 원장으로 다시 공무원 밥을 먹게 된 그가 가장 중요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