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추석도 이른 추석이라 추석 같지 않게 보내고, 시월에 접어든 후로도 날씨가 후텁지근하여 가을이 가을 같지 않더니, 오랜만에 추적거리는 가을비를 보니 반갑다.
이 비 그치고 나면 북쪽에서 찬 공기가 밀려와 초겨울 날씨가 될 거라고 한다. 바바리를 꺼내봐야 되겠군, 목도리는 쓸 만한 게 있던가, 든든한 청바지 두 벌이 있으니 겨울 옷차림은 걱정을 안 해도 되겠군, 머리에 떠오르는 이런저런 두서없는 생각들을 바라보다가, 문득 여름이 이제는 확실히 지나가버렸다는 생각이 머리를 스친다.
제대로 된 태풍이나 호우를 맞이한 적도 없는 것 같은데 여름이 끝이라니 좀 아쉽다는 생각을 하다가, 바람이나 수재로 피해를 입을 사람들을 생각하면 그런 생각은 죄받을 일이지 싶어 얼른 마음을 단속한다.
계절이 변하고 시간이 흐르는 일이 도무지 꿈만 같다. 잠깐 정신을 차리고 보면 시간은, 커다란 앨범이 한 페이지씩 휙휙 넘어가 있는 모양으로 지나가 버린다. 차분하게 비 내리는 모습이 너무 좋아 창문을 살짝 열고 빗소리를 듣다가, 이런 날이면 열일 젖히고 술 한 주전자 따끈하게 데워 풍경 좋은 창가에서 낮술이나 한잔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마시다 취기가 오르면 벽에 기대서 졸아도 좋고, 누군가 옛 노래들을 흥얼거려주면 그것도 좋고, 같이 입을 맞춰 욕할 만한 사람이 있으면 더욱 좋고. 마음 맞는 친구 둘만 있으면 좋겠다 싶다가, 옛 친구들 면면을 떠올리고 나니 마음이 썰렁해진다.
풋풋하고 싱그럽던 시절은 다 탕진해 버리고 이제는 구중중하고 냄새 나는 중년이 되어 있는 친구들. 게다가 그들이 곧 내 거울이 아닌가. 그래도 내 눈 앞에 떠오른 얼굴들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시간의 더께가 두텁게 내려앉은 겉모습 사이로 청신하고 맑았던 옛날 얼굴들이 보이기도 한다.
그런데도 나이든 척 근엄한 척 어른인 척 하며 사는 꼴이 우습고 귀엽기도 하다. 그렇게들 나이 들어가는 사이에 이상하게 변해버린 친구도 있고, 연락이 뜸해지다보니 마음까지 멀어져버린 친구도, 주어진 시간을 압축해서 쓰고 먼저 세상을 떠나버린 성미 급한 벗들도 있다.
비 오는 날은 길이 막힌다. 면도를 끝내고, 좀더 서둘러야 한다고 생각하며 출근 준비를 하는데, 조간신문 1면에는 연일 거듭되는 경제 위기에 대한 기사가 실려 있다. 주식이나 펀드 같은 것과는 무관하게 살고 있지만, 급락하는 주가나 급등하는 환율이 남의 일만은 아니다.
독자들의 PICK!
가족들을 미국에 보내고 기러기 아빠 노릇을 하는 친구의 얼굴이 떠오르다가, 취업을 위해 뛰어다니는 졸업반 학생들 얼굴이 떠오르다가, 앞으로 20년 넘게 갚아야 할 모기지 은행 빚이 떠오르기도 한다. 인생이 좀 허망하다는 생각을 하다가, 술이 아니라도 좋으니 이런 날은 그냥 비 내리는 창가에서 맑은 차 한 주전자와 함께 아무 생각 없이 앉아 있을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을 한다.
잠시 멍하니 창밖을 바라보는데, 눈 내리는 소리를 괜찮다 괜찮다고 표현했던 미당의 시 한 구절이 떠오른다. “울고/ 웃고/ 수그리고/ 새파라니 얼어서/ 운명들이 모두 다 안기어 드는 소리/ 큰놈에겐 큰 눈물 자죽, 작은놈에겐 작은 웃음 흔적/ 큰 이야기 작은 이야기들이 오보록이 도란거리며 안기어 오는 소리//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괜찬타// 끊임없이 내리는 눈발 속에서는/ 산도 산도 청산도 안기어 드는 소리.”
그러자 가을비 내리는 소리가 내게는 ‘괜찬타’로 들리기 시작한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괜찮다. 취직이 좀 안 되더라도, 환율이 올라 살림이 어려워지더라도, 아직 갚아야 할 빚이 창창하게 남았을지라도, 창가에 앉아 낮술 하는 생각은 언제나 비오는 날의 꿈일 뿐일지라도, 괜찮다 괜찮다. 그래도 젊은 사람들은 사랑에 빠지고 결혼을 하고, 나이 든 사람들은 집안을 꾸리고 아이들을 돌본다.
이보다 더 험한 시절에도 사람들은 살아남지 않았는가. 제 아무리 빙하기가 온다고 해도 괜찮다, 괜찮다. 우리 아이들은 건강하고 아직 우리는 살아 있지 않은가. 괜찮다, 괜찮다, 가을비 오는 날 아침, 출근길의 내 머리를 스쳐간 생각들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