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의 포인트]"경기 얘기할 때가 아니다"
유가 부담도, 상승 피로감도, 경기 사이클 하강 논란도 수급 앞에서는 힘을 못쓰고 있다.
6일 종합주가지수는 6일째 상승세다. 890 탈환을 시도 중이다. 이제 900까지는 10포인트 남짓 남았다. 900이 박스권 상단이라는 의견들이 많았다. 과연 그럴까라는 의심이 짙어지고 있다. 사서 오르는데야 고점 논란이 의미가 없다.
이날 증시는 한 때 외국인과 개인, 기관이 모두 순매도를 보이며 떨어지기도 했지만 낙폭이 크지 않았다. 프로그램 매도 압력까지 있었지만 하락폭을 키우지 못했다. 기타법인으로 분류되는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 때문이었다. 그리고 연기금을 중심으로 기관투자가들이 속속 순매수 전환하고 외국인마저 매수 우위로 돌아서자 증시는 다시 상승세로 방향을 잡는 듯하다.
많은 약세론자들이 경기 사이클 하강을 이유로 현재의 랠리는 펀더멘털에 근거하지 않은 베어마켓 랠리, 가짜 랠리라고 주장한다. 반면 강세론자들은 지금은 경기 사이클을 논의할 때가 아니라고 한다. 그야말로 증시 체질이 근본적으로 바뀌는 리레이팅이라는 것이다. 주가가 오를 때마다 리레이팅 주장이 나온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올해 증시가 보여줬듯, 과거와 달리 720에서 더 이상 떨어지지 않았듯 지수 등락 사이클 자체가 변하고 있다는 조짐은 뚜렷하다.
한 투자자문사 사장은 경기 사이클을 이유로 약세를 주장하는 쪽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세계 성장 모멘텀이 둔화되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경기 사이클이 급격히 하락하는 것은 아니다. 올해 4% 수준의 성장에서 내년에 2%로 급강하하는 것이 아니고 3.5% 수준으로 내려간다면 증시 영향은 크지 않다. 지금 국내 증시에서 일어나고 있는 수급상 커다란 구조 변화는 이런 정도의 경기 하강은 이길 수 있다. 세계 경제가 완전히 망가지는 것이 아니라면 상승세는 계속될 것이며 이는 과거와 다른 대세 상승이다." 이 사장은 1200까지 간다면 아직도 40%의 수익률을 얻을 수 있다며 지금도 매수가 늦지 않다고 말했다.
현재의 50달러대 국제 유가와(사실 국제 유가는 안정될 것이란 기대감이 더 높다) 경기 하강 정도라면 수급 개선이 충분히 이기며 증시를 끌어올릴 수 있다는 주장이다. 그렇다면 장기적인 수급 변화란 무엇인가.
1992년 증시 개방 이후 12년간 외국인 투자자들이 거래소시장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0%에서 44%로 높아졌다. 외국인 비중이 이렇게 높아졌다는 것은 국내 투자자가 12년간 줄기차게 주식을 팔아왔다는 얘기다. 지난 18개월간 외국인은 거래소시장에서 33조원을 순매수했다. 외국인이 이렇게 순매수했다는 것은 국내 투자자들이 33조원을 팔았다는 얘기다.
그러나 이러한 국내 투자자들의 '팔자'가 근본적으로 바뀌고 있다. 이러한 대세 변화는 이미 시작됐다. 기관 투자자와 개인 투자자들이 주식을 사기 시작한 것도 분명한 변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가장 큰 매수 주체는 상장기업들이다. 우량 상장기업들은 M&A 위협 방어를 위해 자사주 매입을 계속하고 있다.
독자들의 PICK!
삼성전자가 올해만 4조원의 자사주를 순매수했다. 국민연금의 올해 주식 투자 규모는 아웃소싱한 것을 포함해 3조4000억원이었다. 삼성전자의 자사주 매입과 국민연금의 주식투자 규모가 내년에도 이 정도로만 유지된다 해도 내년에 삼성전자와 국민연금의 주식 수요만 7조원이 넘는다.
개인들도 움직이고 있다. 물론 투자자별 매매를 보면 개인은 '팔자'를 계속하며 외국인과 기관에 주식을 떠넘기고 있다. 그러나 개인 투자의 패러다임도 변했다. 과거와 같은 직접 투자가 아니라 간접 투자가 늘고 있다. 미래에셋자산운용에 따르면 적립식 펀드에 일주일 평균 150억원 이상의 자금이 유입되고 있다. 이 수준이 유지만 된다고 해도 미래에셋자산운용 적립식 펀드에만 연말까지 2000억원 이상의 주식 투자 자금이 유입된다. 랜드마크투신 역시 신규 계약이 하나도 없이 현재 수준만 유지된다고 해도 연말까지 적립식 펀드에 추가로 들어올 자금이 800억원 가량이다.
삼성전자 외에 다른 기업의 자사주 매입, 국민연금 외에 다른 연기금들의 주식 투자, 적립식 펀드를 통한 개인들의 주식 투자 등을 모두 합한다면 내년 국내 투자자들은 최소 10조원 이상을 순매수해야 한다. 2006년에는 연기금 주식투자 허용 법안이 본격 발효되면서 연기금의 주식 투자가 2005년과 본질적으로 다르게 급증한다. 국민연금의 경우 돈이 들어오는 절대적인 규모도 늘어나 주식 투자 비중이 현 수준으로 유지된다고 해도 주식에 투자할 자금이 크게 증가하게 된다.
한 투자자문사 사장은 "최근에는 자금이 좀 들어오고 있다"며 "기관이 올해 장이 급등했다 급락하는 바람에 자금 집행을 못하고 있었는데 이제는 포기하고 자금을 집행하고 있다"고 말했다. 또 "포스코가 현재 주가 수준에서도 배당수익률이 5%로 채권 수익률이나 예금 금리보다 높으니까 배당만 노려도 주식에 투자할만하다고, 과거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 같다"고 말했다.
수급 변화로 인해 국내 증시는 리레이팅 중이다. 이러한 리레이팅을 이끄는 것은 외국인 투자자가 아니라 역설적이게도 국내 투자자들의 주식 수요가 늘고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경기 하강에도 핵심 우량기업들의 실적은 견조할 것으로 예상되고 은행의 경우 오히려 내년에 실적이 더 좋아질 것으로 전망된다.
재료보다는 수급, 수급보다는 경기란 증시 격언이 틀린 것은 아니다. 그러나 경기 사이클의 커다란 흐름이 급강하가 아니라면 수급이 이길 수도 있다는 의견들이 제기되고 있다. 아니면 "수급의 근본적 변화 자체가 경기 펀더멘털과 같은 힘을 가진다"(박효진 굿모닝신한증권 수석연구원)고 볼 수도 있다.
이날 기관은 프로그램 매도 때문에 투신이 283억원 순매도 중이지만 종금만 283억원 순매수하며 이를 상쇄하고 있다. 보험이 38억원, 기금이 101억원 순매수다. 국채 수익률 3.5%면 운용 수수료를 감안하면 국채를 사서는 역마진이다. 보수적인 은행들마저 주식 투자를 하지 않을 수 없다는 딜레마에 빠져 있다. 예금금리 4%에 국채수익률 3.5%다. 도저히 답이 안 나온다.
미국 증시가 1980년대에 장기 박스권을 뚫고 대세 상승으로 돌아선데는 1983년부터 도입한 기업연금의 힘이 컸다. 기업연금으로 주식 투자가 늘어나고 기업들의 자사주 매입이 증가하면서 미국 증시는 1980년대 중반부터 1990년대까지 쭉 대세 상승을 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