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자수첩]'을(乙)' 신세의 자본시장 파수꾼들

[기자수첩]'을(乙)' 신세의 자본시장 파수꾼들

변휘 기자
2016.09.29 09:49

#"우리 회계사들은 뼛속까지 을(乙)입니다."

국내 대형 회계법인 파트너 회계사의 말이다. 공부 잘 하는 친구들 가운데서도 가장 똑똑한 '최고급 인력'들만 모였다는 회계업계지만 실제 업무에선 '갑(甲)'과는 거리가 멀다는 고백이다. 그래서 젊은 회계사들은 법인을 떠나 공무원이나 대기업 직원의 삶을 선택한다.

#"신용평가사의 '등급장사'는 영업정지나 인가취소까지 한다는데, 정작 평가대상이면서도 평가에 개입하려는 기업은 어떻게 제재하나요."

지난 22일 금융위원회가 발표한 '신용평가시장 선진화 방안'에 대한 한 신평사 실무자의 평가다. '손뼉도 마주쳐야 소리가 나듯' 등급장사도 구매자와 판매자를 모두 감시해야 하지만, 기업들의 신평사에 대한 영향력 행사를 차단할 수 있는 방안은 미약하다는 것.

#"IR 강령이요? 증권사 매니저한테 주문 안 준다는데 같은 회사 애널리스트로 부담이 없을까요? 곧 떠날 임원이 '매도' 보고서를 장려한 것도 무책임하긴 마찬가지지만요."

금융감독원이 지난달 말 ·발표한 '기업설명(IR)·조사분석 업무처리강령'에 대한 한 증권사 연구원의 평가다. 증권사 임원은 '임기 마치면 그만' 금감원에겐 '남의 일'이지만 애널리스트들은 "생계를 이어가야 할 일터"에서 상장사 눈치를 볼 수밖에 없다는 것. 실제 올해 발간된 증권사의 기업 보고서 1만7000여건 중 '매도' 의견은 단 1건 뿐이었다고. '중립(hold)' 의견이 사실상 팔라는 메시지로 받아들여지는 게 시장의 현실이다.

전문가들은 자본시장의 파수꾼들이 힘을 잃었다고 입을 모은다. 최근 대우조선해양과 한진해운 사태 등에서 불거진 분식회계와 늑장 신용등급 조정, 매도 보고서 등은 비난을 면키 어려운 대목이다. 이 과정에서 불법행위 또는 중대한 과실이 있었다면 징계는 물론 민·형사상 책임도 엄중하게 물어야 한다.

그러나 파수꾼들과 감시당하는 기업들의 뒤바뀐 갑을관계를 제자리에 돌려놓는 게 우선이다. 회계법인이나 신평사, 증권사 연구원들이 '고객'인 기업들에 고개를 숙여가며 직·간접적으로 '수주'마저 도맡아야 하는 현 상황에서 진정한 의미의 '감시'는 작동하기 어렵다.

회계제도 개혁안, 신용평사 선진화 방안, IR 강령 등을 잇달아 발표하면서도 '기대 이하'라는 볼멘 소리가 계속되는 이유. 금융당국이 귀 기울여야 할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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