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로벌 인사이트]
위기(危機)는 위험(危險)과 기회(機會)가 합쳐진 말이다. 위기를 어떻게 넘기느냐에 따라 나락으로 떨어질 수도 새로운 도약을 맞을 수도 있다는 얘기다.
리더에게 위기는 중요한 시험대다. 역사가 자신의 이름을 어떻게 평가할 지가 바로 위기에서 결판난다.
특히 21세기 들어 다른 사람의 의견을 경청하고 권력을 공유하는 부드러운 리더십으로 대중의 마음을 사로잡아온 여성 리더들에게 위기의 의미는 더욱 크다. 이미지가 아닌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계기로 작용하기 때문이다.
뛰어난 미모와 지성, 화려한 언변 혹은 여성성을 뛰어넘는 매력으로 세상의 이목을 끌며 등장한 글로벌 여성 정치 지도자들이 근래 시험대에 잇따라 오르고 있다.
◇뚝심의 메르켈=최근 몇 달새 신문의 1면에 가장 많이 나온 여성을 꼽는다면 아마 앙겔라 메르켈 독일 총리(57)가 단연 꼽힐 것이다.

뚝심의 여인, 끈기와 결단 등 메르켈 총리를 대변하는 단어는 현란하지만 그 접점은 바로 신념이라는 단어 하나에 모인다. 그의 신념은 극심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노동시장 개혁을 밀어붙였으며 법인세율을 낮추는 등 통일 후 독일을 유로존 최대 경제대국으로 성장케 했다.
최근 들어서는 유럽의 전무후무한 재정위기 사태를 맞이해서도 그리스의 민간 채권단 채무 탕감 비율이나 유럽재정안정기금(EFSF) 확대 방식을 둘러싼 각국의 첨예한 이견을 조심스러우면서도 꿋꿋한 방식으로 봉합하면서 꺼져가는 유럽 통합의 불을 살렸다.
포브스는 지난 8월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100대 여성을 발표하면서 메르켈 총리를 1위에 올렸다. 포브스는 이론의 여지가 없는 유럽연합(EU) 지도자로 유럽 경제 위기 속에서 보여준 그의 리더십이 선정 이유라고 밝혔다.
그의 신념은 메르켈 총리가 자라온 배경과도 무관하지 않다.
메르켈 총리는 1954년 서독 함부르크에서 태어났지만 동독 선교를 목표로 한 루터교 목사였던 아버지를 따라 태어난 지 얼마 안돼 동독으로 가 성장했다. 늘 그의 집 근처에는 비밀경찰이 있었으며 아버지는 엄격한 자기절제를 강조했다. 유로존 위기 해결에 조심스러웠던 그의 태도가 이해될 만한 대목이다.
메르켈은 스물셋이던 1977년 작센주 라이프치히 대학 같은 물리학과 동급생인 울리히 메르켈과 결혼했으나 이 결혼은 4년 후 이혼으로 끝이 난다. 메르켈은 활동적이었지만 남편은 자신만의 생활을 추구했기 때문이었다. 이후 81년 자신의 물리학 박사 논문을 감수했던 요아힘 자우어 박사와 98년 두번째 결혼을 하게 된다. 메르켈은 두번의 혼인에서 모두 아이가 없다. 이에 그는 “정치에 투신했을 때 서른다섯이었고, 이후 아이 문제가 생각나지 않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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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은 89년 베를린 장벽이 무너진 후 민주화 운동에 투신해 90년 통일 독일 총선거에서 하원의원에 당선돼 여성청소년부 장관, 환경부 장관, 유럽연합(EU) 의장 등을 두루 거쳤다. 2005년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가 됐으며 2007년에는 마가렛 대처 전 영국 총리에 이어 여성으로서는 두번째로 주요 8개국(G8) 의장직을 맡기도 했다.
그러나 메르켈의 현재가 순탄치는 않아 보인다.
우선 유럽 주변국 지원과 관련해 독일 내부의 반대 여론이 심상치 않다. 오늘날의 경제를 이루기 위해 뼈를 깎는 노력을 했던 독일 국민에게 방만한 예산과 과잉복지로 국고를 탕진한 그리스를 지원하려는 메르켈 총리가 예뻐 보일리 없다. 최근 한 여론 조사에서는 그리스 구제금융에 반대한다는 목소리가 60%를 넘었다.
지난 9월 독일 연방헌법재판소가 유로존 재정위기를 겪고 있는 그리스를 독일이 지원하는 것이 합헌이라며 메르켈 지원에 나섰지만 메르켈 총리가 이끄는 우파연합이 잇따라 선거에서 참패한 것은 메르켈에게 부담이다.
메르켈이 이끄는 중도 우파 기민당과 연정 파트너인 보수성향의 자유민주당, 기독교 사회당은 유럽 재정적자 해결안에 대해 일일이 맞서며 메르켈에게 내상을 입혔다. 시장에서는 그가 공산주의 동독 출신이라 금융시장을 이해 못한다는 비난까지 나왔다.
독일 일간지 슈드도이체 자이퉁의 커트 키스터 수석 편집장은 “메르켈 총리는 유럽을 이끌만한 종류의 사람이 아니다”라며 메르켈을 평가절하하기도 했다.
유럽 재정적자 해결책을 마련했다 해도 아직 갈 길은 멀다. 그리스가 내년 초 결국 디폴트(채무 불이행)에 이를 것이라는 분석이 나온지 도 오래다. 메르켈의 중도적이고 조심스러운 접근법이 계속될지 궁금하다.
◇홍수 앞에 흘린 눈물=태국의 잉락 친나왓 총리(44)도 최근 주목받는 여성

지도자 중 한명이다.
지난 7월 잉락 총리는 정계입문 두달반만에 총리에 당선됐다. 물론 탁신 친나왓 전 총리라는 오빠의 후광이 크게 작용했지만 화려한 외모와 언변, 겸손한 태도, 정치 신인에게서 볼 수 있는 풋풋함은 신선함 그 자체였다.
하지만 7월25일부터 석달 넘게 계속되고 있는 50년만의 태국 홍수는 친나왓 총리의 앞날에 먹구름을 드리우고 있다. 한 해커가 잉락 총리의 트위터를 해킹해 “두달 넘게 지속된 홍수로 200명이 넘게 사망하고 나라 전체가 쑥대밭이 된 상황에서 이미지 개선에만 신경쓴다”라며 비난할 정도였다.
잉락 총리는 26일 결국 눈물을 흘리며 정부가 홍수사태를 통제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고 실패를 인정했다.
잉락 총리가 실패한 가장 큰 원인은 그가 위기해결을 위한 통합의 접근법을 제시하지 못했다는데 있다. 홍수가 정치 문제화되면서 그는 야당 민주당 소속인 수쿰판 빠리밧 방콕시장과 군부의 공조를 이끌어내지 못했다.
제때 수방대책을 실행하지 못했다는 것도 이번 문제를 키운 가장 주요한 요인으로 꼽힌다. 치수 사업 대신 임금 인상 등 포퓰리즘 성격의 정책이 최우선 순위에 올랐기 때문이다.
실제로 잉락 총리가 선거 당시 내건 정책은 농민을 위한 쌀값 인상, 초등학교 입학생에게 태블릿PC 무상지급, 최저임금 인상 등이었다. 포퓰리즘 정책이 결국 친나왓 총리를 비난의 물바다에 밀어던진 셈이다.
이번 홍수로 342명이 사망했고 태국 국내총생산(GDP)가 2%포인트나 떨어질 것이란 전망도 나온다. 피해규모는 60억달러에 이른다. 1만4818개의 사업장과 67만8227명의 노동자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태국에 생산기지가 있던 개인용 컴퓨터(PC), 자동차 부문은 동일본 대지진 때와 같은 부품부족 현상을 맞고 있다. 파이낸셜타임스는 PC업체들의 비용 부담이 소비자 가격인상으로 이어지며 PC가격이 상승하고 있다고 보도했다. 토요타, 혼다, 닛콘은 이번 홍수로 생산차질을 빚고 있고 소니는 신제품 카메라 출시를 연기했다.
JP모간체이스는 일본 자동차 업체들이 이번 태국 홍수로 5억달러 이상의 손실을 볼 것으로 추정했다. 또 워싱턴포스트는 태국 농경지의 12.5%가 침수됐다며 쌀 생산이 최악의 상황을 맞을 수 있다고 전했다. 쌀 생산 타격은 쌀값 인상은 물론 중국의 인플레 압박을 가중시켜 둔화 추세인 긴축정책의 고삐를 다시 죄게 만들 수도 있다.
잉락 총리가 취임 초기의 난국을 어떻게 극복할지 세계가 주목하고 있다.
◇성장의 부메랑=최근 고민이 많은 여성 정치 지도자중 빠지지 않을 이가 바로 지우마 호세프 브라질 대통령(64)이다. 높은 인플레와 중국의 저가제품, 헤알화 평가절상과 이에 따른 핫머니 유입에 호세프 대통령의 고민은 깊어지고 있다.

호세프 대통령의 가장 큰 적은 어쩌면 최고의 경제 호황기를 물려준 루이스 이그나시오 룰라 다 실바 전임 대통령일지도 모른다. 룰라 전 대통령의 퇴임 당시 지지도는 90%에 달했다. 군정에 맞서 한때 좌파 무장활동까지 벌인 호세프는 ‘룰라노믹스’의 계승을 선언했지만 룰라의 실용과 포용의 리더십, 높은 경제성장률 등은 그가 넘어야할 숙제다.
호세프 대통령은 “많은 신흥국가처럼 브라질은 글로벌 위기에서 비켜나 있다”면서도 “위기를 헤쳐 나갈 우리의 능력이 제한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라며 고민을 드러냈다.
이에 맞서는 호세프 대통령의 전략은 대담하다. 브라질 중앙은행은 선제적으로 금리인하에 나서 통화완화 정책을 꾀하고 있다. 2008년9월 리먼 브러더스 붕괴 당시 4개월을 기다리며 금리인하를 머뭇거렸던 것과는 대조적인 모습이다. 중국 등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헤알화 고공행진을 막기 위해 수입차에 대한 30% 세금인상도 마다하지 않고 있다.
그러나 내년 브라질 정부는 수백억달러를 사회보장 프로그램에 사용할 예정이다. 14.7%의 최저임금 인상, 인프라 개발과 함께 2014년 월드컵, 2016년 리오데자네이루 하계올림픽 등 돈 쓸 일이 줄줄이 대기중이다.
최저임금 인상에 130억달러, 저소득 가구를 위한 보조금에 60억달러, 스포츠 이벤트에는 적어도 45억달러가 소요될 전망이다. 지난 1월 취임 이후 호세프 대통령은 280억달러 규모의 예산안 감축을 승인했지만 호세프 대통령이 가야할 길은 험란하다.
귀툴리오 바르가스 재단의 루이스 쉬무라 연구소장은 뉴욕타임스와의 인터뷰에서 “좋은 의도이긴 하지만 호세프 대통령을 둘러싼 정치적 압박이 상당하다”고 말했다.
경제학자들은 올해 브라질의 성장률이 약 3.5%로 전년에 비해 둔화될 것으로 보고 있다. 더군다나 경제성장의 한 축이었던 소비마저 둔화되고 있는 것도 부담이다.
경제의 구조적 변화가 성장을 방해할 것이란 우려도 나온다. 정부 추산에 따르면 지난해 경제 생산에서 산업이 차지하는 비율은 15.4%로, 2004년 19.2%에서 줄어들었다.
무디스의 알프레도 코티노 애널리스트는 “소비가 줄어들고 있기 때문에 브라질의 미래는 불확실하다”며 “일부에서는 브라질이 산업공동화 단계에 들어섰다는 지적도 나온다”라고 말했다. 호세프의 고민도 여기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