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르메스 못 사도 명품 버터는 산다"...4배 비싸도 지갑 턱턱[트민자]

"에르메스 못 사도 명품 버터는 산다"...4배 비싸도 지갑 턱턱[트민자]

정혜인 기자
2026.03.22 06:05
[편집자주] 트민자는 '트렌드에 민감한 기자'의 줄임말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눈에 띄는 흐름을 포착해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마음과 시대의 이야기를 들여다봅니다.
/사진=블룸버그
/사진=블룸버그

"내 토스트가 방금 미슐랭 스타로 승격됐다."

영국의 스타 셰프 토마스 스트레이커가 론칭한 버터 브랜드 '올 띵스 버터(All Things Butter)' 틱톡 영상에 달린 베스트 댓글이다. 토스트에 사용한 버터가 그만큼 '고급지다'는 뜻이다. 올 띵스 버터 외에도 '버터계 에르메스'로 불리는 프랑스 보르디에는 세계 주요 도시에 연일 품절 대란을 일으킨다. 노란 버터 덩어리일 뿐이지만 감각적인 디자인의 포장지는 향수 패키지를 연상케 한다.

이른바 프리미엄 식재료가 글로벌 젠지(Z세대·1990년대 후반~2010년대 초반 출생)들의 새로운 '위시리스트'로 등극했다. 경기 불안과 고물가 속에서 이들이 지갑을 여는 대상은 더 이상 '소유'의 상징인 명품 가방이 아니다. 한 끼 식탁 위에서 즉각적인 만족을 주는 버터, 허브 등이다.

고물가에 따른 소비 부담은 전세계적 현상이다. 외식·여행·명품에 선뜻 지갑을 열기 어렵다. 그렇다고 소비를 완전히 멈추자니 삶이 팍팍하다. 여기서 탄생한 타협점이 바로 '저가 럭셔리'(Affordable Luxury)다. 지갑이 허락하는 선에서 자신을 위로할 수 있는, 작지만 강렬한 만족에 돈을 몰아주는 방식이다.

이 흐름은 식탁 위에서 가장 선명하다. 장바구니 물가는 아끼면서도 특정 품목에는 과감히 사치하는 '선택적 과소''가 관찰된다. 실제로 미국 유통 데이터에 따르면 일반 버터 판매는 정체된 반면 '프리미엄' 버터 매출은 1년 새 두 자릿수 성장률을 기록하며 전체 카테고리 성장을 견인했다. 블룸버그는 미국인들이 다른 지출을 줄이면서도 프리미엄 버터 구매에는 돈을 아끼지 않는다고 분석했다.

영국 버터 브랜드 '올 띵스 버터' 언박싱 영상 /영상=틱톡
영국 버터 브랜드 '올 띵스 버터' 언박싱 영상 /영상=틱톡
명품 대신 식료품 매장으로…'프리미엄 버터', 새로운 지위의 상징

프랑스 파리의 고급 식품점 '라 그랑드 에피세리'(La Grande Epicerie)의 지난해 버터 판매량은 19톤(t). 2023년 대비 300% 이상 폭증한 수치다. 매장 관계자는 "젊은 고객들이 명품 매장 앞에 줄을 서는 대신, 이곳에서 한정판 버터를 사기 위해 기꺼이 지갑을 연다"고 전했다.

보르디에 버터는 일반 제품보다 3~4배 비싸지만, 수요는 줄지 않는다. 젠지에게 버터는 단순한 식자재를 넘어 취향을 드러내는 수단이 됐기 때문이다. 영국 가디언은 "버터가 하나의 '패션 아이템'이자 자신의 안목을 드러내는 '스테이터스 심벌'(Status Symbol·지위의 상징)이 됐다"고 평가했다.

이런 현상의 배경에는 젠지의 소비 가치관이 '소유'에서 '짧고 강한 경험'으로 이동한 데 있다. LA타임스는 "젠지들은 수천 달러짜리 명품 가방을 사기 위해 몇 년을 저축하는 대신 지금 당장 느낄 수 있는 미각적 즐거움과 SNS에 공유할 수 있는 감각적 경험을 택한다"고 분석했다. 전문가들은 이를 거시 경제의 불확실성 속에서 큰 자산 구매는 포기하지만, 일상의 작은 부분에서만큼은 최고급을 누리려는 심리로 본다.

틱톡과 인스타그램에서 퍼진 '버터 보드'(Butter Board) 인기도 이 사치 소비를 부추긴다. 도마 위에 버터를 펴 바르고 과일과 허브, 식용 꽃으로 장식한 '버터 보드' 사진은 마치 명품 개봉(언박싱) 영상만큼이나 세련된 라이프스타일의 상징으로 소비된다. 블룸버그는 '저가 럭셔리'의 확산을 불안정한 경제 구조 속 젠지들이 습득한 '생존 전략'이라 평했다. 집값과 일자리 불안 탓에 전통적인 자산 축적이 어려워진 이들에게, 작은 사치는 현재의 나를 지키는 일종의 심리적 안전장치인 셈이다.

/사진=인스타그램 버터보드 트렌드(@butterboardstrend)
/사진=인스타그램 버터보드 트렌드(@butterboardstre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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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혜인 기자

국제부 정혜인 기자입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눈에 띄는 흐름을 포착해 그 안에 담긴 사람들의 마음과 시대의 이야기 '트민자' 를 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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