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9회 경제올림피아드]김정진·소설

남자는 방금 들어온 메일을 열고 얼굴이 굳어졌다. 내일까지 제출해야할 견적 자료를 이제야 보내준다는 것은 이 계약은 물 건너갔다는 말이었다. 아이템 종류로 봤을 때 족히 닷새는 소요될 작업이었다. 입에서 욕이 튀어나왔다.
"개자식!"
그동안 남자가 이 계약에 들인 공을 생각하자 이가 빠드득 갈렸다. 믿을만한 인간은 못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 정도 받아먹었다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었다. 지금껏 비행기로 기차로 불려 다니며 밑을 닦은 자신의 행적들이 적나라하게 눈앞에 펼쳐졌다. 남자는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쓴 웃음을 지었다.
내가 아직도 세상을 만만하게 보고 있구나, 혼잣말을 하고는 메일을 삭제 했다. 그날 밤 전화를 받지 말아야했다. 아니, 윤과의 질기디질긴 인연을 어느 한 모퉁이에서 사정없이 끊었어야했다고 남자는 후회했다. 후회란 게 늘 늦기 마련이지만 그마저도 하지 않으면 미쳐버릴 것 같았다.
6개월 전, 늦게 시작한 골프에 재미를 들여 온통 골프 생각만 하고 틈만 나면 연습장으로 필드로 나가다가 몸살기가 느껴져 일찍 잠자리에 든 날이었다. 핸드폰이 진저리를 치다가 방바닥으로 떨어졌다. 잠자리에 들면서 핸드폰 끄는 일을 깜박했나보다. 바닥에 떨어져서도 지치지도 않고 웅웅거렸다. 남자는 끙, 하고 짜증 섞인 신음을 내고 방바닥을 더듬어 핸드폰을 찾아들었다. 윤이었다. 하기야 이 늦은 시각에 전화를 할 위인도 이렇게 길게 신호음을 울릴 위인도 윤이 아니고서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남자는 헛기침을 한 번 하고 통화버튼을 밀었다.
"아이쿠, 윤 부장님!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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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는 반가운 느낌을 잘 바른 자기 목소리에 잠깐 놀랐다가 이내 말을 이었다.
"이 야심한 밤에 어인 일이신지요?"
윤은 이미 취한 상태였다.
"어이, 정 사장, 우리 사이에 윤 부장님이라니! 친구야, 우리 친구 아이가?"
남자는 실소가 나오려는 것을 억지로 참았다. 윤이 친구 운운하면 그 다음 이야기는 뻔했다. 돈이었다. 윤이 오늘 밤 마신 술값을 남자가 지불해야한다는 계산이 재빨리 나왔다. 윤은 자기과시를 하고 싶을 때 시간 따위는 상관하지 않고 남자에게 전화를 걸어 술값이야기를 했다.
"친구야, 내가 아무 때고 술 사달라고 하면 술 사주는 친구가 있다고 했더니 아, 이 사람들이 요즘 세상에 그런 사람이 어딨냐고 안 믿는기라. 그래서 내가 화가 나서 전화했다."
윤은 술이 들어가면 사투리가 튀어나왔다. 서울살이가 십년이 넘어도 사투리만은 어쩔 수가 없는 모양이었다. 남자는 액수를 물었다. 공치사가 늘어지는 윤의 혀 꼬인 소리를 중간에 자르고 전화를 끊었다. 남자는 문명이 지나치게 발달된 요즘세상이 싫었다. 아무데서나 아무 때나 통화가 가능하다는 것도 마음에 안 들었고 아무데서나 아무 때나 송금이 가능한 환경도 마음에 안 들었다. 왜 핸드폰을 끄지 않아서 이런 덤터기를 쓰는지 억울하다가 윤이라면 내일 아침에라도 기어이 수금을 해 갈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한숨만 크게 한 번 쉬었다.
송금을 하려면 아내를 깨워야했다. 남자는 아직 폰뱅킹이나 인터넷뱅킹 같은 것을 해본 적이 없었다. 그건 여자들의 몫이었다. 경리나 아내가 있다는 것은 참 편리한 일이었다. 한밤중에 아내를 깨운다는 게 좀 껄끄러운 일이긴 했다. 아내와 같은 방을 썼다면 통화를 하는 동안 아내는 잠을 깼을 것이고 통화내용을 유추해서 해야 할 일을 굳이 설명하지 않아도 되었을 텐데, 하는 생각을 잠깐 했다.
남자가 아내와 각방을 쓰는 데 특별한 이유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냥 그렇게 되어버린 거였다. 신혼 때는 한 이불을 덮고 잤다. 침대를 샀고 아이가 생겼다. 세 사람이 침대에서 자기는 너무 비좁았고 조그마한 아이는 예상 외로 많은 자리를 차지했다. 아내는 아이를 안고 바닥에서 잤다. 둘째아이가 태어나자 아내는 딴 방에서 아이 둘을 끼고 잤다. 그러다 큰아이가 혼자 잘 나이가 되자 2층 침대에 두 아이를 재웠다. 아내는 남자 옆에서 몇 번 자보더니 도저히 편치 않다면서 바닥으로 내려갔다. 세월이 흘러 아이들이 공부하러 집을 떠나 방이 남아돌자 아내는 아주 딴방으로 옮겨 앉았다. 남자는 아내와 방을 따로 쓰는 게 편했지만 그런 내색은 하지 않았다. 자유롭게 통화나 채팅을 할 수 있고 방귀를 붕붕 뀔 수도 있었다. 자다가 문득 깨어나 더 이상 잠이 오지 않을 때는 TV를 틀거나 혼자 수음을 즐길 수도 있었다. 그런 일들은 조용하고 은근하게 해야만 해서 나름대로 스릴 있고 재미있었다.
남자는 작게 노크했다. 아내 또한 자신이 하는 조용하고 은근한 것들을 하고 있을 수도 있으므로 벌컥 문을 연다든가 하는 예의 없는 짓은 하지 않았다. 아내는 남자의 늦은 방문을 뜨악한 눈으로 맞았다. 남자는 미안한 낯으로 용건을 말했다. 아내는 고개를 두 번 까딱이는 것으로 남자의 용건을 마무리 했다. 윤의 이름을 뱉는 순간 아내는 남자의 방문목적을 파악했다. 남자는 송금액을 말하고 문을 닫았다. 남자는 돈을 뜯기는 느낌이 들었으나 잘 하면 투자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을 했다. 아내 역시 같은 생각이었기에 아무 말 없이 노트북을 찾아든 것이다.
다음날 윤의 전화를 받은 남자는 어젯밤의 찝찝함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남자 회사의 일 년 매출액의 2/3에 해당하는 구매 건이 연말에 있을 거라고 말했다. 어떻게 해서든 계약을 성사시켜줄 테니 걱정 말라는 말을 속삭이 듯 했다. 남자는 사무실 비상계단에 앉아 주위를 살핀 후에 휴대폰을 입술에 바짝 갖다 댄 쥐새끼 같은 윤이 눈앞에 보이는 듯 했다. 남자는 돈을 벌게 해준다는데 쥐새끼면 어떻고 쥐벼룩이면 어떠랴 생각했다.
그날 이후 윤은 서울본사로 울산지사로 남자를 불러댔다. 남자는 요리를 사고, 술을 사고, 여자까지 옆구리에 끼워서 호텔방으로 윤을 올려 보냈다. 늘씬한 여자의 팔에 매달리다시피 걸어가는 윤의 뒤통수에 "너무 무리하지 마라, 친구야! 희숙아, 부장님 잘 모셔야 된다. 알것나?" 하고 혀 꼬인 소리로 말했다.
남자는 술이 취한 게 아니었다. 접대를 하면서 한 번도 술에 취한 적이 없었다. 세상에 공짜는 없는 법이었다. 순서는 늘 같았다. 거래처에서 건수가 있다는 냄새를 풍기면 향응을 제공한다. 견적서가 날아오고 적당한 선에서 네고가 이뤄진다. 계약서가 날아오고 다시 향응이 제공되면 물품대금이 입금 되었다. 밥줄이 달린 술자리에서 실수는 용납될 수 없었다. 남자는 적당한 선에서 술을 조절했다. 그러나 상대방에게는 나도 당신처럼 취했다는 것을 보여줘야 한다. 술이란 게 같이 시작해서 같이 취해야 마시는 맛이 나는 법인데 접대하는 자가 맨 정신으로 마주앉아 있다면 그런 결례가 없다고 남자는 생각했다.
윤은 신림동에 집이 있었다. 그런데 남자를 서울로 부르면 꼭 호텔방 하나를 잡아달라고 부탁했다. 단골 술집이 논현동에 있는데도 굳이 방 하나를 따로 요구했다. 그 말은 여자를 사달라는 말이었다. 남자는 울산에서 접대할 때와는 달리 집을 코앞에 두고 성 접대를 받는 윤보다 성 접대를 하는 자신이 더 역겹게 느껴지곤 했다. 그래서 남자는 서울에서 윤을 접대할 때는 여자 없이 혼자서 잤다. 오래 뒤척이거나 밤을 꼬박 새우기도 했지만 오물을 피한 기분이 들었다.
처음 윤을 만났을 때는 남자도 윤도 말단 사원이었다. 윤은 대기업으로 철강제품을 납품하는 회사의 구매부에, 남자는 철강유통회사 영업부에 근무했다. 사장의 지인을 끈 삼아 윤의 사무실에 들락거리며 공을 들였다. 그때의 윤은 지금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1미터 65센티도 채 안 돼 보이는 단신의 왜소한 체구가 오히려 눈에 띄었다. 달라진 게 있다면 눈빛이었다. 원래도 반들거리던 눈동자가 더 큰 회사로 옮기고 승진을 하면서 더 반들거리게 된 것이다. 남자가 기억하는 윤과의 첫 대면은 썩 유쾌하지 못했다. 분명히 발주가 있을 것이라는 연락을 받고 윤을 찾아갔건만 인사인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한 고갯짓을 한 번 하고는 제 할 일만 했다. 남자는 그렇게 삼사십 분을 윤의 옆자리에 앉아서 기다려야했다. 윤은 남자에게 몹시 불친절하고 고압적인 자세를 취했다. 남자는 속으로 '좆만한 새끼가!' 하고 욕을 했지만 예, 예, 하면서 연신 고개를 주억거리며 윤의 말을 들었다.
몇 번의 접대와 봉투가 오고 간 후 윤은 남자에게 부쩍 친한 척을 했다. 그러나 자신의 입장이 난처해지는 일이 생기면 언제 그랬냐는 듯 싸늘해졌다. 납품을 하다보면 녹이 슬거나 휘어진 파이프가 있기 마련이었다. 카본파이프는 습기에 취약해서 쉽게 녹이 슬었지만 녹이 깊어 곰보가 지거나 천공이 생기지 않는다면 사용에는 문제가 없었다. 윤의 상사가 제품에 대해 한 마디 했다면 윤은 상사를 설득하지 않고 즉각 새 제품으로 교환을 요구했다. 남자는 제품을 반품 받아서 쇼트나 샌딩 처리를 한 후에 다시 납품했다. 운송비와 기타 경비가 곱으로 들었다. 무엇보다 남자는 윤의 이중적인 태도가 혐오스러웠다. 그것은 사회구조의 가장 말단에 위치한 자기혐오이기도 했다.
남자의 부모는 노점상이었다. 리어카에 채소를 싣고 주택가 골목을 누비며 무, 배추, 호박 따위를 팔았다. 판자촌에서 온 식구가 방 한 칸에서 살았다. 남자가 동생을 키우고 동생은 그 아래 동생을 키웠다. 그리고 각자 자신을 챙기며 살아야만 했다. 생활은 눈금자의 눈금만큼씩 펴졌다. 자세히 보면 제자리걸음만 열심히 하고 있는 꼴이었다. 남자는 언젠가는 사회구조의 중심이나 꼭대기쯤에 가보고 싶었다.
남자가 가장 잘 하는 것은 견디는 것이었다. 어떤 상황에서 누구를 만나든 빠르고 정확하게 판단하고 적절히 대처했다. 그것이 구토가 날 정도로 고약한 것일지라도 견뎠다. 살면서 늘 해오던 익숙한 것들이었다. 그런 견딤이 없었다면 하층구조 속에서 살아남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영업은 견디는 일이었다. 초대받지 않은 곳에 가서 낯선 시선과 홀대를 견디며 초대가 빈번한 사람이 되어야했다.
남자의 영업력은 탁월했다. 한 번 술을 마시면 누구든 호형호제하게 하는 능력이 있었다. 술이 사람을 사람이 아니게 만드는 순간까지 비위를 맞추다보면 대개는 남자를 편하게 받아들였다. 술을 마실 줄 모르는 사람과는 밥을 먹었다. 그런 사람은 대부분 소극적이거나 자기관리가 철저한 성격이이어서 이야기를 들어 줄 사람이 필요했다. 적재적소에서 분위기를 띄울 줄 알고 확실하게 대접을 받고 있다는 느낌이 들도록 자신을 낮췄다. 그렇다고 남자가 화통하고 놀기 좋아하는 성격은 아니었다. 오히려 소심하고 쉽게 피로를 느끼는 편이었다. 자신의 소심함과 저질체력을 숨기기 위해 더 큰 목소리로 호응해주고 커피와 각성제를 빌어서 길고 긴 접대의 향연에 임했다. 뭐든 하면 늘게 마련, 남자는 화통하고 잘 노는 사람으로 거래처에서는 알고 있었고 남자도 어느 날부터는 자신의 성격이 원래 그랬다고 생각하게 되었다.
메일을 읽고 윤에게 욕을 퍼붓고 자책을 하는 것은 남자 혼자 할 수 있어서 그나마 덜 힘들었지만 아내에게 계약이 결렬됐다는 말을 하기는 쉽지 않았다. 아내가 할 실망보다 그 인간 너무 믿지 말라던 아내의 말을 무시한 데 대한 미안함과 쑥스러움 때문이었다. 아내는 표현이 솔직한 사람이었다. 에둘러 말하거나 마음에 없는 말은 하지 못했다. 아내의 그런 면을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했다. 게다가 그 일로 쓰고 다닌 경비가 수천은 된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내는 몇 날 잠을 못 잘지도 모른다.
평소에 남자는 뭐든 제 손에 들어오지 않은 것은 자기 것으로 생각하지 않는 철저함이 있었다. 정기결제로 입금 될 물품대금도 통장에 찍히지 전까지는 내 것이라고 여기지 않았다. 돈이라는 게 간사해서 언제든 마음이 바뀌어 딴 곳으로 새어나갈 수 있었다. 자금사정이 좋지 않아 결제가 미뤄질 수도 있고 그 사이 부도가 날 수도 있었다. 그런데 남자는 이번에는 왠지 자꾸만 들어올 돈에 대해 계획을 세우고는 했다. 그런 낌새를 채고 '옜다, 엿!'하고 돈이 달아나버렸는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들었다.
남자가 영업직을 버리고 사무실을 열었을 때 제일 먼저 찾아간 사람이 윤이었다. 구매부 과장이 된 윤에게 부스러기를 주우러 간 것이었다. 남자의 신용과 자금력으로는 윤의 회사와 큰 건의 거래는 불가능했다. 너무 보잘 것 없어서 선뜻 납품하라고 말하기 부끄러운 것들을 던져달라고 부탁했다. 윤 또한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사람이었으므로 남자는 비교적 편하게 생각했다. 그러나 윤은 언제 우리가 만난 적이 있었냐는 뜨악한 얼굴로 눈조차 마주치려하지 않았다. 건성건성 드문드문 영양가 없는 말 몇 마디를 듣고 엿 같은 기분으로 돌아섰다. 그 후로 한동안 남자는 윤을 잊었다. 가끔 윤을 생각할 일이 생기면 가래침을 뱉었다.
어찌어찌 사무실이 자리를 잡고 직원도 몇 생겼다. 남자는 철강단지 안에서 제법 잘 나가는 사장이었다. 고철장사로 시작해서 철강업자가 되었거나 그런 사장 아래서 일을 배워 독립한 사람들이 대부분인 바닥에서 남자는 배운 놈이라 좀 다르다는 말을 들으며 비교적 빠르게 성장했다. 그래봤자 지방대학 출신일 뿐이었지만 남자는 용의 꼬리보다는 뱀의 머리가 나았다.
어느 날 사무실에 나타난 윤을 보고 남자는 잠깐 동안 표정을 어떻게 지어야할지 난감했다. 서류가방을 들고 초라한 웃음을 짓고 있는 윤은 그 사이 더 작아진 것 같았다. 지난 감정을 앞세우기에는 윤의 몰골이 남자의 뒤통수를 친 격이었다. 윤을 데리고 밥을 먹었다. 밥을 먹으면서 윤은 슬금슬금 남자의 눈치를 보았다. 남자는 그런 윤을 그냥 보낼 수 없어서 술도 샀다. 술이 들어가자 윤은 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근무하던 회사가 부도가 나서 더 작은 회사에 평사원으로 들어갔다고 했다. 사람을 부리다가 부림을 당하는 게 얼마나 자존심이 상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할 때 윤에게 말했다.
"형편에 따라 적응해야겠지요? 그게 가장의 비애 아니겠어요? 또 부릴 날이 오겠지요."
정작 남자가 하고 싶었던 말은 '새꺄, 정신 차려!' 였다.
윤이 본론으로 들어갔을 때 남자는 조금 당황스러웠다. 장난을 치자는 이야기였다. 남자에게 구매를 하겠다. 단, 일정 금액을 얹을 테니 얹은 금액만큼은 자신에게 달라는 말이었다. 윤의 말에 따르면 누이 좋고 매부 좋은 일이었다. 남자는 생각해 보겠다고 했다. 그런 일을 해도 되는지 판단이 서지 않았고 윤에게 쉽게 보이고 싶지 않아서였다. 남자는 그때 서른 중반이었고 아직은 때가 덜 묻은 시절이었다.
아내의 반응은 남자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내 그럴 줄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는 표정이었다. 이미 지출된 경비에 대해서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중견기업으로 자리를 잡았지만 아직도 자금관리만은 직접하는 아내였다. 회사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남자에게 묻지 않고도 알 수 있는 방법이었다. 게다가 남자의 씀씀이도 관리가 되는 일이기도 했다. 남자는 불편한 점이 없지 않았지만 돈 관리를 가족이 아닌 타인에게 맡긴다는 것도 내키지 않았다. 조카가 경리로 있으면서 몇 억인가를 빼돌려서 명품을 사는 데 탕진했고 그 회사는 결국 부도가 났다는 뉴스를 본 적이 있었다. 소규모의 회사뿐만 아니라 제법 규모가 있는 회사라도 일 이억에 부토가 나는 일은 흔했다. 그보다 적은 액수로도 부도는 날 수 있었다. 의리나 인정으로 어음결제를 미루고 부도를 막을 수는 없다.
"그 인간이 당신에게 물 먹인 게 이번으로 두 번째죠?"
남자는 아내의 말에 상처에 고춧가루를 뿌린 듯 고통스러웠다. 이번 상처와 지난 상처가 한꺼번에 들고 일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윤의 제안을 남자는 오래 고민하지는 않았다. 윤이 새로 몸담은 회사는 남자가 영업을 갔다가 일언지하에 거절을 당한 곳이었다. 이미 거래처가 있고 이름도 듣지 못한 소규모의 회사와는 거래할 수 없다는 냉랭한 말을 듣고 돌아왔었다. 윤이 제안한 장난을 친 적은 없었지만 그런 일이 종종 일어나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남자가 근무했던 곳에서도 그런 일로 쫓겨난 직원이 있었다. 일종의 도둑질이었다. 남자 입장에서 보면 도둑질이 아니라 도둑질을 눈감아 주는 일일 뿐이었다. 윤이 무슨 짓을 하든 그건 남자가 알 바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직원 중 누군가가 그런 일을 한다면 남자는 미쳐버릴 것 같았다. 교묘한 도둑질에 회사가 망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자 그 일을 한다는 게 꺼림칙하고 끔찍했다. 며칠 뜸을 들이다가 윤에게 연락했다.
"대금에 얹는 일은 하지 맙시다. 그건 도둑질이잖소? 그냥 내가 일정액의 커미션을 주는 걸로 합시다. 내 쪽에서는 영업비라고 생각하면 되는 일이니까요."
둘 사이의 거래는 성실하게 이루어졌다. 윤은 커미션 외에도 자주 찾아와서 밥값이며 술값을 축냈다. 윤은 커미션을 통장으로 받으려하지 않았다. 흔적이 남는 일은 하지 않겠다는 뜻이었다. 꼼꼼한 일처리와 영리한 영업으로 윤은 인정을 받기 시작한 것 같았다. 구매량이 점점 많아졌다. 대금은 어음으로 결제되었지만 신용이 좋은 회사여서 남자는 걱정하지 않았다. 어음이 들어오면 만기일까지 기다릴 수 없어서 할인을 했다. 업계에서는 '어음깡'이 통상적인 용어다. 적지 않은 수수료를 물었다. 어음할인 수수료, 윤의 커미션과 접대비를 계산해보면 별로 남는 것이 없었다. 그렇더라도 돈이 돈다는 게 중요했다. 돈은 혈액처럼 혈관을 타고 순조롭게 돌아야한다. 그것이 막혀버리면 나락으로 떨어지는 것이었다. 돈이 돌고 있는 한 적자가 나더라도 회사는 존재할 수 있었다. 회사가 존재해야 흑자를 꿈꿀 수 있었다.
처음으로 큰 물량이 떴다. 남자가 감당할 수 없을 만큼의 큰 물량이었다. 공급을 위해서는 수급이 있어야한다. 수급에는 자금이 필요하다. 남자는 회사의 규모를 키우고 유지하는 데 전력하고 있었기 때문에 늘 자금이 부족했다. 여기서 받아서 저기에 주고 저기에 받아서 여기에 주는 꼴이었다. 종종 사채를 쓰기도 했다. 이 건을 성공적으로 끝내면 그런 일들은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너무도 매력적이었다.
윤이 말했다.
"친구야, 우리 이번 건으로 한 번 폼 나게 일어서 보자. 우리 친구아이가? 나는 정 사장이 내랑 갑장이라는 걸 알았을 때 마, 말도 놓고 농담도 하고 그라고 싶었다. 우리가 알고 지낸 세월이 얼매고? 우리 친구 묵자!"
남자는 그 말에 비위가 몹시 상했지만 큰일을 도모하는 시점에서 자잘한 일에 신경을 쓸 게 아니란 생각을 했다. 십년을 알았으면 친구라고 해도 되지 않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다. 게다가 윤은 남자의 자금력을 걱정하면서 믿을만한 사람을 소개해주겠다고 했다.
예순은 넘겼을 여자는 곱고 단아했다. 사채놀이를 할 거라고는 생각할 수 없을 만큼 교양과 귀태가 흘렀다. 일하는 아주머니에게 커피와 과일을 내오라고 이르고는 남자를 찬찬히 뜯어봤다. 커피와 과일이 나오자 여자는 입을 열었다.
"윤이 소개하는 사람이라 믿고 만납니다. 오래 쓸 것은 아니라고 들었는데 이자율이 얼만지는 알고 왔지요?"
여자한테서 진한 향이 느껴졌다. 뿌린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향수는 몹시 자극적이었다.
"네, 석 달만 쓰면 됩니다. 이자는 4부로 들었습니다."
남자는 제 입으로 말하고 나서야 4부라는 게 얼마나 높은 이자인지를 실감했다. 원금의 4퍼센트는 적은 돈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만큼 큰돈을 융통할 수 있는 곳을 남자는 알지 못했다.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남자는 차용증을 쓰고 도장을 찍었다. 여자는 미소를 지으면서 공증을 받을 것이라고 말했다. 커피가 썼다. 과일도 썼다.
일은 착실하게 진행되었다. 적당한 물건들을 적당한 가격에 매입했다. 윤은 큰 건수이니만큼 얼마간의 선수금을 원했다. 남자는 커미션에도 선수금이 있는지 의아했지만 이 일에서 윤의 역할이 얼마나 중요한지를 알기에 커미션 중 일부를 건넸다.
납품이 끝나고 윤은 직접 어음을 들고 남자에게 왔다. 남자는 거하게 윤을 접대했다. 윤은 대접이라고 말했고 남자는 접대라고 생각했다. 그날따라 윤은 남자에게 더 자주 '친구야'를 외쳐댔다. 싫지 않았다.
어음을 할인한 돈을 들고 집으로 갈 때 남자는 난생처음 어깨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꼈다. 이제는 바닥을 벗어났다는 안도감이 행복감으로 바뀌었다. 아내를 침대로 불렀다. 수표와 돈다발을 아내에게 던지며 큰 소리로 웃었다. 아내도 남자를 따라 오랜만에 큰 소리로 웃었다. 두 사람은 너무 행복해서 서로 껴안고 울었다. 그동안 견뎌온 많은 일들을 다 털었다. 아내는 이제 더 이상 친정이나 친구들에게 아쉬운 소리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게 제일 좋다고 했다. 남자는 파이프를 잔뜩 사서 창고를 가득 채울 수 있게 되어서 좋다고 했다. 파이프 천 톤을 가지는 게 남자의 목표였다. 남자는 그 정도면 아들까지도 먹고 사는 일은 걱정하지 않아도 될 거라고 생각했다. 그날 밤 남자와 아내는 머리맡에 돈뭉치를 두고 오래 서로를 탐했다.
남자의 행복은 딱 한 달로 끝이 났다. 납품하고 익월에 정기 결제가 있는 회사가 있고 두 달 만에 정기 결제가 있는 회사가 있었다. 윤의 회사는 후자였다. 3개월짜리 어음 만기가 돌아왔을 때 어음할인을 해줬던 곳에서 부도사실을 알려왔다. 남자는 윤에게 전화를 걸었다. 윤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윤의 회사로 달려갔다. 채권자들과 물품공급업자들이 회사 집기를 던지며 사장 나오라고 소리치고 있었다. 창고라도 털자고 누군가 말했지만 또 다른 누군가가 이미 은행에 넘어갔지 남았겠소? 털면 절도죄로 잡혀갈 거요, 하고 말했다. 남자는 다리가 풀려서 주저앉았다. 집기를 부수고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은 이겨낼 정도의 여력은 있는 사람들일 거라고 남자는 생각했다.
인생은 도미노와 같은 것이었다. 하나가 무너지면 옆에 것들이 연이어 무너지고 결국에는 모든 것이 땡, 소리 나게 바닥을 쳤다. 남자는 경찰서로 불려가 조사를 받았다. 어음을 회수하겠다고 약속을 하고 경찰서를 나올 때 한 순간 휘청하면서 앞이 캄캄했다. 남자는 경찰서 계단에 앉아 있다가 천천히 일어나서 윤이 소개해 준 여자에게 갔다. 여자는 이렇게 빨리 다시 올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남자는 윤의 소재를 아느냐고 여자에게 물었다. 여자는 윤이 내게 연락을 해오지 내가 윤에게 연락을 하지는 않지요, 하고 조용히 말했다. 그 말은 윤의 소재를 모른다는 말인지 안다는 말인지 애매했다. 남자는 여자가 윤에 대한 질문을 더 이상 듣고 싶어 하지 않는 다는 것을 눈치 챘다.
"아마도 사장님은 지난 번 보다 더 돈에 쫓기고 있을 테지요? 그런 상황에선 돈을 빌려주지 않거나 이자를 더 받는 게 통상적입니다만, 거래가 한 번 있었고 그 거래가 성실했으니까 지난번과 같이 이자를 받도록 하지요."
여자는 선심 쓰듯 말했지만 차용증과 함께 담보를 요구했다. 남자는 지난번에는 왜 담보이야기가 없었는지 생각해 봤다. 윤이 계약서를 여자에게 담보로 제공했을 거라 짐작되었다. 남자는 윤도 무서웠고 앞에 앉아 우아하게 커피 잔을 든 여자도 무서웠다. 교양과 귀태는 남자와 같은 사람들이 제공하는 피 같은 돈으로 이뤄진 것이라는 것을 남자는 알게 되었다.
매달 이자를 감당하기도 벅찼다. 그러다보니 물품대금을 미루게 되고 신용이 하락했다. 신용이 하락하자 남자는 비싸게 물건을 사와야만 했다. 비싸게 사온 물건은 비싸게 팔거나 마진이 거의 없이 팔수밖에 없었다. 비싼 물건은 잘 팔리지 않았다. 남자는 더 이상 철강단지에서 잘 나가는 젊은 사장이 아니었다. 경험도 없는 놈이 먹물 좀 들었다고 까불다가 말아먹은 놈에 불과했다. 직원들을 모두 내보냈다. 전세로 있던 사무실과 창고를 정리하고 8평짜리 철강단지 사무동으로 옮겼다. 창고 안에 쌓아두었던 파이프들은 헐값으로 처분한 지 오래였다.
북쪽에 위치한 사무실은 언제나 어둡고 추웠다. 혼자 있을 때는 가능하면 난로도 때지 않았다. 월세도 밀리기 일쑤였다. 추락한 젊은 사장은 금세 잊혀졌는지 전화도 몇 통 오지 않았다. 남자는 춥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고 외롭기도 했다. 무엇보다 경리도 한 명 없는 사무실을 누가 신뢰할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남자는 학습지 교사로 생활비를 벌고 있는 아내를 불렀다. 아내 역시 인터넷이 세상을 바꾸는 바람에 학습지 교사를 그만 둬야하는 상황과 마주하고 있었다. 방문교사가 찾아와서 문제지 검사나 하고 가는 교육은 구식이 되었고 불편한 일이 되었다. 그런데도 학습지 회사는 회원 수를 늘리라고 아침마다 닦달했다. 아내는 사교적이지도 못하고 비위가 좋지도 못해서 근근이 가방을 메고 벨을 누르며 다니고 있었다.
아내가 사무실에 나오자 남자는 좀 기운이 나는 것 같았다. 함께 출근하고 함께 추위를 견디고 함께 퇴근을 하는 사람이 있어서 좋았다. 아내가 사무실에 나와서 일을 하겠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남자는 한 마디로 잘라 말했다. "마누라까지 불러내 일시키는 무능력한 남자로는 안 보이고 싶어." 지금은 이미 사람들에게 무능력한 남자라는 낙인이 찍혔기 때문에 그런 시선 따위는 신경 쓰이지도 않았다. 어쩌면 아무도 신경 쓰지 않는 것을 남자 혼자 예민하게 군 것 일지도 몰랐다.
전화 한 번 울리지 않는 날도 남자는 괜찮았다. 트럭에서 파는 어묵을 국물과 같이 비닐봉지에 담아 와서 아내랑 점심을 대신했다. 아내는 괜찮아질 거라고 주문을 걸 듯 자주 말했다. 어쩌다 걸려오는 전화를 얼마나 상냥하게 받는지 남자는 놀라곤 했다. 파이프 몇 개라도 마다하지 않았다. 건너 편 사무실의 창고에서 외상으로 물건을 사고 그 사무실의 절단기와 크레인을 빌려 썼다. 일은 많고 복잡한데 이문은 얼마 남지 않는 일들을 남자에게 주기 시작했다. 남자는 일부러 귀찮다고 투정부리듯 말하면 아내는 짐짓 아이를 나무라는 엄마 같은 표정을 지었다. 작은 일일지라도 일은 살아있다는 느낌을 갖게 했다. 작은 일이 쌓이자 신용이 되었다. 남자는 쓴 맛을 본 뒤에 정신 차린 괜찮은 놈으로 철강단지 안에서 인식되기 시작했다.
철강단지의 월세 사무실을 벗어나 창고 옆 컨테이너박스에 사무실을 꾸린 남자는 뿌듯했다. 아직은 파이프 몇 다발이 재고의 전부지만 창고를 가득 채우는 날이 오리라는 것을 남자는 의심치 않았다. 그렇게 모든 것이 새롭고 희망차기만 한 어느 날 남자는 컨테이너박스 문을 열고 들어서는 낯익은 얼굴에 눈을 의심했다. 윤이었다. 남자가 인사를 할 것인지 말 것인지를 고민할 때 윤이 손을 잡고 흔들었다. 이상한 악수였다.
"“어이쿠! 정 사장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너무 격조했지요? 하하하하"
남자는 격조라는 단어에서 비위가 확 상했다. 도무지 윤과 격조를 운운할 사이는 아니었다. 남자가 아직 입도 열기 전에 윤은 번지르르하게 자기 이야기를 늘어놓았다. 어떤 일이 있었는지 모르지만 윤이 내민 명함에 산업용 열교환기용 보일러를 제작, 수출하는 상장회사 이름이 찍혀 있었다. 그 아래 윤의 이름이 있었다. 부장이었다. 명함을 보다가 윤을 보았다. 의기양양한 얼굴로 남자의 시선을 맞받았다.
"정 사장, 이제 퇴근 하지? 한 30분 먼저 퇴근해도 안 되나? 사장인데?"
남자는 이 자리에 아내가 없다는 게 다행스러웠다. 아내는 몸살기운이 있다며 일찍 퇴근했다. 윤의 방문은 늘 해가 질 무렵이었다는 것을 남자는 기억해냈다. 밥과 술과 잠자리까지 쓰리스텝으로 연결이 되는 소위 '풀코스'를 즐길 타이밍을 윤은 잘 알고 있었다. 남자는 어떻게 거든 거절을 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잊고 있었던 여자의 향수냄새까지 기억이 났다. 헐값으로 떠넘긴 재고들과 다른 사무실로 보내야했던 일 잘하던 직원들 얼굴도 기억이 났다.
"이제 단순하게 파이프를 파는 시대는 끝났어. 저거 팔아봤자 얼마나 돼? 고부가가치의 아이템으로 갈아타야 된다고. 한 두 공정만 더 거치면 두 세 배의 이익이 창출 되는데 왜 이렇게 구시대적으로 사업을 하고 있어?"
남자는 윤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았다. 열교환기용 튜브에 대한 이야기였다. 파이프는 두께와 길이만 맞춰서 팔면 되지만 열교환기용 튜브는 기계적 성질을 고려해서 인발과 열처리 등을 거쳐야하고 그런 과정에서 금속의 성질이 변하는 것도 감안해야한다는 정도는 알고 있었다. 파이프는 단순한 만큼 용도가 다양해서 소용 되는 곳이 많았지만 튜브는 사용이 한정되어있었다. 한정된 업체를 상대로 영업과 판매를 해야 한다는 말이었다. 복잡한 공정을 거쳐 한정된 업체에 공급하는 형태이니 고부가가치일 것이고 동시에 치열한 경쟁을 의미하기도 했다. 남자는 사전적 의미만 알고 있을 뿐 구체적인 것들은 알지 못했다.
"끝난 시대 붙잡고 있는 나는 왜 찾아왔소? 아직은 내가 털릴 게 아무 것도 없으니 뭐가 좀 생기면 그때 오지 그랬소?"
남자는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윤에게서 얻을 수 있는 게 많다는 것을 직감했다. 잘만하면 실질적인 공정들을 알 수 있을 것이고 더 잘 하면 새 시대에 걸맞는 사업을 할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공부한다, 생각하고 밥값 술값은 수업료다, 생각하기로 하니 마음이 좀 누그러졌다. 한편으로 설마 이 인간이 또 나를 엿 먹이기야 할까?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윤은 작은 체구에도 잘 먹었다. 그렇게 사라졌다 나타났는데도 어색함이나 미안함 따위는 어디에도 없는 듯 했다.
"정 사장, 지난번에는 속 마이 상했제?"
남자는 부도 사실을 진즉에 알고 있었을 텐데 왜 미리 귀띔을 안 했는지 묻고 싶었다. 그 정도 규모의 회사가 하루아침에 부도가 날 리 없었다. 윤은 부도가 날 조짐을 알고도 남자에게 발주를 하고 여자를 소개해서 사채를 쓰게 만들었을 거라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남자에게서 커미션을 먹었듯 여자에게서도 커미션을 먹었을 것이고 회사에서는 또 뭔가 잇속을 챙기지 않았을까, 하는 의심이 늘 들었다.
"정말로 나도 몰랐다. 알았으믄 내가 그랬겄나? 너무 면목이 없어서, 거래처가 한두 군데도 아니고. 그래서 내가 잠수를 탄 기라. 오해 했을 끼고만. 암, 나라도 오해 했제!"
남자는 윤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다. 그 말이 진실이든 아니든 지나온 그 캄캄하고 막막했던 세월은 들추고 싶지 않았다. 생각만으로도 끔찍했다.
"튜브를 생산한다고 해도 판로가 있어야지. 인발공장도 뚫기 힘들고 수압테스트니 뭐니 하면서 제품 검사도 꽤 까다롭다고 하던데?"
윤은 어떤 소재를 사서 어느 공장에서 가공을 할 것인지는 자신이 다 알아서 선을 댈 것이니 염려 붙들어 매라고 했다. 판로는 자기가 있지 않느냐고 했다. 절대 부도날 일은 없으니 안심하라고 했다. 남자는 여러 손을 거쳐 윤의 회사 어음을 받은 적이 있었다. 할인 수수료가 다른 어음에 비해 훨씬 쌌다. 어음할인업자는 이런 어음을 들고 와야 나도 좋고 사장님도 좋은데 말입니다, 하고 말했었다.
남자는 윤의 소개로 소재를 사고 가공을 했다. 여기저기 다니면서 귀동냥도 하고 전문서적도 읽으면서 튜브에 관련된 지식들을 쌓았다. 화학적 성질과 기계적 성질, 물성치에 대해서 알아갔다. 시행착오를 겪으면서 대체 소재들까지도 알게 되었다. 남자는 단순한 판매가 아닌 제조가 마음에 들었다. 물건을 만든다는 것은 다양한 변수를 가졌다. 온도와 시간, 처리방법에 따라 다른 결과가 나왔다. 그래서 경제적 손실 위험도 따랐다. 언제나 긴장해야했고 연구해야했지만 재미있는 일이었다.
윤은 처음의 호언장담처럼 든든한 구매처는 되어주지 않았다. 남자는 큰 기대가 없었으므로 실망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부만 열심히 한 것이 더 안심이 되었다. 윤과의 거래는 어쩐지 불안할 것 같았다. 어차피 큰 물량을 공급할 재력도 실력도 없었다. 남자는 자기 통장에 든 돈 외에는 어떤 돈도 믿지 않았다. 남에게 돈을 빌리는 일은 비싼 이자를 주고도 비굴하고 구차했다.
어쨌거나 윤은 파이프에서 튜브로 갈아탈 수 있도록 해주었다. 남자는 그것만으로도 윤과의 과거는 덮을 수 있었다. 철강단지에서 했던 것처럼 튜브를 팔았다. 부스러기부터 천천히 덩어리를 향해 갔다. 속도라는 게 가속이 붙게 되면 더 이상 힘을 가하지 않더라도 달리게 되어있다. 덩어리까지 가기가 힘들었지 그 후로는 남자도 제어할 수 없을 정도로 속도가 붙었다.
제조 시설도 없는 남자가 성공할 수 있었던 비결은 외주공장 직원들을 자신의 직원처럼 대했기 때문이었다. 두세 달에 한 번씩 회식비를 보내고 휴가철이 되면 휴가비를, 명절이 되면 갈비를 보냈다. 남자는 내 물건을 만드는 사람들이라면 내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외주공장 직원들은 남자의 주문을 가장 신속하게 처리했고 어떤 요구도 흔쾌히 들어주었다. 남자는 한 공장에만 생산을 의뢰했다. 정확한 결제로 가격 조정도 할 수 있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물건은 경쟁업체들 보다 싸고 질이 좋았다. 문제가 생기면 남자는 업체와 시시비비를 가리지 않았다. 무조건 새 제품으로 교환해 주었다. 업체들은 남자와 거래할 때 불안해하지 않았다.
국가경제가, 세계경제가 어렵다고 매년 난리를 쳐댔다. 남자에게 경기가 좋았던 세월은 인생을 통 털어 지난 5년이 전부였다. 그 5년 동안 아이 둘을 유학 보냈고 작지만 사무실과 공장도 지었다. 그런데 작년부터 좋지 않은 조짐이 보이기 시작했다.
중국산 소재로 튜브를 가공해서 일본산으로 둔갑을 시켜 유통한 업체들이 경찰 조사를 받고 사장이 형을 살기도 했다. 아예 중국에서부터 일본브랜드로 마킹까지 해서 들어오는 제품들도 많았다. 한국에서 가공을 한 제품보다 더 많은 문제가 발생했다. 그래도 사람들은 쉽게 그런 일들을 그만두지 못했다. 일본산으로는 수지타산을 맞출 수도 없었고 아예 발주가 불가능했다. 남자도 몇 번 알고도 모르고도 그런 제품을 사기도 했고 팔기도 했다. 욕심을 부리다가 나락으로 떨어져본 기억이 남자를 그런 일에서 서둘러 손을 떼게 만들었다. 그러자 총매출은 비슷한데 이윤이 대폭 감소했다. 이미 씀씀이가 커진 회사와 집을 유지하기에도 빠듯했다. 남자는 3천 톤의 재고를 갖고 있었지만 그걸로 아들 대까지 먹고 살 수는 없었다. 뭔가 다른 방법을 모색해야만 했다. 남자는 제자리걸음만 하다가 종내는 뒷걸음질 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에 종종 잠을 설쳤다. 그런 남자에게 윤이 자기 회사 프로젝트 하나를 슬며시 내민 것이었다.
윤의 제안을 남자가 덥석 문 것은 아니었다. 남자도 나이를 먹으면서 먹을 것과 먹어서는 안 되는 것들을 구분할 줄 알게 되었다. 크고 달콤할수록 무병장수와는 거리가 멀다는 것도 알았다. 아내와 이야기해보고 절친한 거래처 사장과도 의논했다. 두 사람 다 비슷한 말을 했다. 투자가 아니라 투기라는 개념으로 접근하라고 했다. 잘 되면 크게 한 탕 하는 것이고 아니면 얼마간의 손해와 상처를 안게 될 것이라는 말이었다.
남자는 아무리 자제하려고 해도 자꾸만 꿈을 꾸게 되었다. 자체브랜드를 가지고 싶었다. 그러자면 제조공장이 있어야했다. 지금의 사무실과 창고의 세 배의 부지와 제조시설이 있어야했다. 남자가 마음만 먹는다면 지금도 못 저지를 일은 아니었지만 은행 빚을 과도하게 짊어지고 사업을 벌이는 짓은 하고 싶지 않았다. 까딱 잘못하다가는 은행 배만 불려주다가 쪽박을 찰 수도 있었다. 남자는 나이가 들수록 신중해지는 자신이 마음에 들었다. 한 번 했던 쓴 경험들은 반복하지 않는다는 게 남자의 신조였다. 중국에서 파이프를 수입해서 자신의 공장에서 가공을 하고 금속비파괴검사기로 테스트를 거치면 일본제품 못지않은 튜브를 만들 수 있다. 그렇게만 된다면 일본제품과 동등한 품질의 제품을 일본제품보다 저렴하게 공급할 수 있다. 한국제품에 대한 신뢰도는 일본 다음으로 높은 편이어서 해외수주에도 경쟁력이 있을 게 분명했다. 남자는 합법적이고도 고부가가치사업에 대한 아이디어와 기술력이 있었다. 자본만 있다면 남자는 성공할 자신이 있었다.
윤과 다시 긴밀하게 얽히는 일은 정말 내키지 않았지만 생각해보면 윤이 남자에게 지금의 안정을 가져다 준 것이기도 했다. 남자는 딱, 이번 한 번만 위험한 관계를 가지기로 결심했다. 물량확보는 발주서를 받는 날부터 하면 되니까 위험부담이라고 해봤자 윤의 접대비가 전부일 것이었다. 어차피 사업을 시작한 그 순간부터 배알은 출근하면서 집에 두고 나왔다. 자존심쯤은 일이 끝난 후에 챙겨도 된다고 자신을 독려했다.
생각보다 윤은 강적이었다. 남자가 더 신중해진만큼 윤은 더 영리해져 있었다. 윤이 요구하는 것들은 언제나 상상 이상이었다. 남자를 서울로 울산으로 불러서는 윤의 부하직원들을 접대하게 했다. 윤의 접대까지는 어찌해보겠는데 윤의 부하직원들까지는 남자의 자존심에 작은 상처를 냈다. 윤은 부하직원들 앞에서 남자를 잘 나가는 사업가로, 친구로, 수하로 들었다 놨다 했다. 윤이 들면 목을 길게 빼고 들리고 윤이 놓으면 몸을 최대한 낮췄다. 남자에게 6개월은 너무 긴 세월이었다.
어제, 남자는 윤의 부하직원의 전화를 받았다. 몇 번 술자리를 같이 했던 사람이었다.
"이게 말입니다. 사실 업체를 통해 시행할 프로젝트는 아니었거든요. 이렇게 큰 물량을 왜 한 손을 거쳐 하겠냐고요. 그냥 우리가 직접 구매하기로 애초부터 계획되어 있던 거였다는 말입니다. 구매 리스트를 부장님이 굳이 보내라고 해서 보내는데 그냥 견적이나 한 번 내 보세요."
남자는 뒷목을 잡았다. 자신도 모르게 신음소리가 나왔다.
"사장님, 부장님과 20년 지기 친구가 맞긴 맞아요? 부장님을 저보다 모르시는 것 같아서요. 그리고 견적서는 내일까지 보내주셔야 한답니다."
아내와 거래처 사장의 조언은 잘못된 것이었다. 윤에게 들인 돈은 생각나지 않았다. 윤에게 바닥까지 보인 자존심이 창피하고 부끄럽고 이가 갈렸다. 같은 인간에게 계속 같은 일을 당하는 자신에게 분노가 치밀었다. 남자는 벽에다 머리를 짓찧고 싶었다.
핸드폰이 울렸다. 엘리제를 위하여가 구슬프게 늘어졌다. 핸드폰 화면에 윤의 이름이 떠 있었다. 남자는 전화를 받을지 말지 고민했다. 무시를 할 것인지 욕을 퍼부을 것인지 결정해야했다. 어느 쪽도 시원한 결말을 없을 것 같았다. 화면을 밀었다.
"친구야, 견적은 뽑고 있나? 가격을 잘 조정 해봐라. 그게 말이야 워낙 경쟁이 치열한 프로젝트라서 웬만하면 쪼끔만 붙이라. 그래야 내가 어떻게든 힘을 써 볼 수 있지 않겠나?"
남자는 잠깐 핸드폰을 귀에서 뗐다. 침을 삼키고 깊게 숨을 들이 쉬었다.
"고맙다 친구야. 내가 너 때문에 살맛이 난다. 오늘 거하게 살 테니까 논현동 그 술집으로 올래? 예약해 놓고 저녁비행기로 갈게. 뭐, 부하직원들도 함께 나오면 좋고."
전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윤의 목소리가 한 톤 높아졌다. 부하직원을 전부 데리고 나와서 부서회식을 시켜도 되겠냐고 물었다. 남자는 그것쯤이야! 라고 대답했다.
남자는 일찍 퇴근해서 아내와 극장에 갔다. 침대형의 좌석에서 음료 서비스를 받으며 아무 생각 없이 영화를 관람했다. 집에서 핸드폰은 저녁 내내 울고 있을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