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T리포트] 석유화학 골든타임 (下)
③정부 주도 구조조정

석유화학 산업의 구조조정에는 기업과 정부 모두가 동의하고 있다. 문제는 '강도'와 '타이밍'이다. 골든타임을 놓치지 않으려면 정부가 보다 적극적인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린다.
17일 업계와 부처에 따르면 정부는 이달 중 '석유화학 경쟁력 강화 방안'을 발표하는 게 목표다. 여기에는 화학 업계의 구조조정을 유도하기 위한 정부의 지원책이 담길 것으로 보인다. 최상목 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은 지난 11일 "석유화학 등 글로벌 과잉공급으로 어려운 업종에 대해 선제적 사업재편을 유도해 나가겠다"고 예고했다.
정부는 자율적인 구조조정을 끌어낸다는 구상이다. 기업활력법을 강화해 구조조정에 대한 세제 혜택을 확대하는 방안이 우선 거론된다. 이외에 △저리의 정책금융 지원 △원재료 관세 인하 △연구개발비 지원 등이 담길 게 유력하다.
더 과감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목소리가 적잖다. 중국·중동발 저가 범용 제품 러시는 기업의 자발적 노력만으로 돌파구를 찾기 힘든 변수이기 때문이다. 정부 주도의 강력한 구조조정이 반드시 동반돼야 한다는 지적이 나오는 이유다.
업계에서 주목하는 게 일본의 선례다. K-화학의 추격에 밀리던 일본은 합병, 설비 폐쇄, 용도 전환 등 구조조정으로 위기를 돌파했다. 1지역 당 1사만 남긴다는 원칙을 세우고, 기업 간 통폐합을 추진했다. 이 과정에서 일본 정부는 특정산업구조개선 임시조치법을 시행해 공동 투자·공동 판매 회사 설립, 과잉설비 처리 등을 지원했다.
이와 유사한 '팀 코리아' 해법도 나왔다. 최근 삼일PwC는 △'빅 딜'을 통해 국내 범용 제품 생산기업을 1~2곳으로 만들고 △나머지 기업들은 스페셜티 생산기업으로 특화하는 것을 골자로 한 구조조정 안을 제안했다. 현재 국내 NCC(납사분해설비)는 울산에 2개, 여수와 대산에 각각 4개 있는데, 이를 통폐합해 가동률을 올리고 채산성을 높이자는 것이다.
구조조정을 거쳐 범용 제품을 생산하기로 한 기업에 대한 시장의 독점적 위치를 인정해줘야 가능한 방안이다. 정부가 독점규제·공정거래에 관한 법률을 완화해야 하는 숙제가 있는 셈이다. 화학 업계는 사업 재편을 위해 이 법을 유예하는 것을 줄곧 요청해왔으나, 정부는 일단 난색을 표하고 있다. 일본의 경우 화학 산업에 한해 공정거래법 적용을 한시적으로 유예해 구조조정을 뒷받침했었다. 정부는 독점 문제 해결을 풀 수 있는 다른 방식을 검토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결국 일본의 사례를 분석해 K-화학에 적용해야 한다는 의견에 힘이 실린다. 과거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K-화학이 중국의 물량에 밀리는 상황이기 때문이다. 산업부 역시 '일본 석유화학 주요 정책 및 현황 조사 연구'에 관한 용역을 긴급 발주했다. 다만 초유의 '계엄 후 탄핵' 정국 속에서 화학 산업을 구할 수 있는 '골든타임'을 놓칠 수 있다는 우려가 증폭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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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창윤 삼일PwC 파트너(전무)는 "지금 석유화학 산업에 닥친 위기와 경쟁의 강도가 역대급인 상황으로, 10~20년 미래에 대한 정부의 준비와 대응이 절실하다"며 "B2C(기업-소비자간 거래) 사업도 아닌 석유화학 산업 구조조정에 대해 공정위 등이 소극적이거나 부정적인 자세를 견지하는 것에 아쉬움이 크다"고 말했다.
④새해 맞는 석유화학

3년 침체를 이어온 석유화학업계의 내년 전망은 일단 나쁘진 않다. 글로벌 설비증설 속도가 꺾이며 업계를 짓눌렀던 공급 부문에서 숨통이 다소 트일 전망이다. 트럼프 2기의 셰일 오일 증산 방침이 현실화하면 유가 안정화로 석유화학 기초 원료인 나프타 도입 가격이 내려가 원가 압박도 걷힐 수 있다. 이 덕에 업계가 흑자로 돌아선다는 관측도 나온다. 하지만 2026년부터 재차 대규모 글로벌 설비증설이 예정돼 있어 내년 업황 회복이 현실화해도 동족방뇨다. 업계가 내년이 2026년 부터 더 매서워질 위기를 구조적으로 개선할 '골든타임'이라고 입을 모으는 이유다.
17일 업계에 따르면 대표적 석유화학 수익성 지표인 에틸렌스프레드(에틸렌에서 원료인 나프타 가격을 뺀 금액)는 이달 초 241달러를 기록했다. 업계 손익분기점이 통상 210~230달러라는 점을 감안하면 이달 들어 흑자전환의 발판이 마련된 셈이다. 평균 스프레드가 169달러였던 올해 1~3분기 석유화학 빅4(LG화학 화학부문, 롯데케미칼, 한화솔루션 케미칼 부문, 금호석유화학)는 5000억원대 누적 영업손실을 냈다. 반등 추세도 좋다. 지난 10월 124달러였던 에틸렌스프레드는 11월 204달러를 거쳐 이제 240선까지 올랐다.
스프레드 개선의 배경은 유가 하락이다. 10월 초 배럴당 80달러에 육박한 두바이유 가격은 현재 73달러 선이다. 이 덕에 원유에서 추출하는 석유화학 기초 원료 나프타의 가격이 같은 기간 톤당 700달러 수준에서 620달러대로 내려가며 원가 부담이 개선됐다. 유가만 안정돼도 석유화학 업계의 마진 구조가 확보되는 셈이다.
장기 부진에 허덕인 업계가 내년 유가 전망에 촉각을 세우는 이유다. OPEC+(OPEC+러시아)와 함께 국제유가 결정권을 쥔 미국의 정책 동향을 고려하면 내년 전망은 긍정적이다.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 당선인은 재임 기간 셰일 오일 생산량을 2배로 늘리는 한편, 내년 미국 휘발유 가격을 절반 낮춘다는 계획이다. 지정학적 변수 탓에 한 치 앞을 예단하기 어려운 유가지만, 3년 침체의 고리를 끊으려는 업계엔 가뭄에 단비와 같은 소식이다.
무엇보다 내년엔 업계 침체의 핵심 원인이던 글로벌 설비증설 속도가 의미있는 수준으로 떨어질 가능성이 높다. 황규원 유안타증권 연구원은 "올해 613만톤 규모인 글로벌 에틸렌 순증설 규모는 내년 423만톤으로 감소하며 공급 압박이 줄어들 것"이라고 말했다. 유럽의 가격 경쟁력을 잃은 설비들이 폐쇄에 나선다는 점도 공급 측면에서 청신호다. 내년 이탈리아 ENI의 연산 97만톤 규모 에틸렌 설비가 폐쇄된다. 이에 그동안 공급과 원가 충격을 가장 크게 받은 롯데케미칼이 내년 흑자전환할 수 있단 관측이 나온다. 금융정보업체 에프앤가이드가 집계한 증권가의 실적 평균 추정치에 따르면 롯데케미칼은 내년 1044억원의 영업이익을 낼 전망이다.
하지만, 이 같은 반등은 글로벌 증설 계획의 큰 틀에서 볼 때 현실화하더라도 1년짜리에 그칠 공산이 크다는게 업계 중론이다. 올해 423만톤으로 내려갈 증설 규모는 2026년이면 다시 1335만톤으로 수직상승한다. 한화투자증권에 따르면 2025~2027년 예정된 글로벌 에틸렌 증설 규모는 3150만톤이다. 2025년 한해만 잠시 쉬어가는 구간일 뿐인 셈이다. 오히려 2025~2027년 연평균 증설 속도는 그동안 업계가 고전한 2022~2024년의 연평균 800만톤을 훌쩍 뛰어넘는 1050만톤이다. 중국이 이 같은 증설 속도전을 주도한다. 2025~2027년 글로벌 증설의 약 65%가 중국에서 진행된다.
한 업계 관계자는 "내년 3년만에 업황이 회복된다면 더 매섭게 다가올 위기를 대비하기 위한 시간을 벌게 된다는 의미"라며 "내년이 정부와의 2인 3각으로 경쟁력을 정비할 골든타임"이라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