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희의 사견(思見)] 이 회장, 이제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지난 3일, 서울고등법원 법정을 나서는 삼성 전·현직 임원들의 얼굴에는 기쁨보다는 회한이 가득했다. 금융위원회가 삼성바이오로직스의 고의 분식회계 의혹을 제기한 2018년 11월 20일 이후 2268일(6년 2개월 18일) 만의 결과에도 크게 웃지 못했다.
1심에 이어 2심에서도 자본시장법 위반 혐의 등 19개 혐의 모두 무죄를 받았음에도 그랬다. 국정농단 관련 2016년 11월 8일 '삼성전자 본사 압수수색'부터 계산하면 3010일(8년 3개월)간은 삼성에게 '잃어버린 시간'이었다.
삼성과 총수 일가를 동일시하지 말라는 주장이 있지만, 기업은 사람이 머물며 일하는 곳이다. 기업 총수는 그 자리의 무게만큼 큰 영향력을 미친다. 삼성이라는 거대 선단의 선장과 1등 항해사, 조타수, 갑판장 등 핵심 인물들 모두 재판을 받았으니, 그 기간 삼성은 망망대해에서 길을 잃은 항공모함과 같았다.
선고 후 법정을 떠나는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과 최지성 전 미래전략실장(부회장), 장충기 전 차장(사장), 김종중 전 전략팀장 등 전·현직 삼성 고위 임원들의 표정에서는 억울함을 벗은 후련함보다는 '잃어버린 시간'에 대한 아쉬움이 묻어났다.
현장에서 만난 한 전직 고위 임원은 "재판부의 옳은 결정 덕분에 마음의 짐을 덜 수 있었다"고 했지만, 또 다른 전직 임원은 "이 일로 몇 년을 재판에 매여 허송세월했느냐"며 아쉬움을 토로했다. 사업보국에 몸바쳤던 50대는 60대로, 60대는 70대에 접어들었다.
지난 3000여 일 동안 진행된 많은 재판 중 상당수를 직접 참관하고 취재했다. 그동안 삼성전자의 반도체 사업은 15조 원에 가까운 적자를 기록했고, SK하이닉스와의 경쟁에서도 밀렸다. 삼성전자의 쇠퇴는 충격적이었다.
사실 전 세계를 통틀어 삼성전자 같은 기업은 많지 않다. 35년간의 일본 식민 지배에서 벗어나 한국전쟁의 폐허 속 후진국 대한민국에서 태어나 세계 1위 제품을 10여 개나 보유했던 기업이 얼마나 있나. 반도체·휴대폰·TV·가전을 동시에 만드는 기업도 거의 없다. 지난해 어려움을 겪었음에도 매출 301조 원, 영업이익 32조 원을 기록한 기업은 삼성전자가 유일하다.
해외에서 환영받는 삼성은 그러나 유독 국내에서는 정치적 사건의 중심에서 비난과 질타를 받아왔다. 한국 기업 '맏이'로서 대신 맞는 매도 적잖았다. 창업자부터 3세 경영자인 이재용 회장까지 세대에 걸쳐 질타의 대상이 됐다. 여러 이슈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는 없지만 지난 3000여 일의 과정을 보면 과했던 것은 아닌지, '비례의 원칙'에 부합했는지는 되짚어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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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결 직후 변호인과 지인들이 "그동안 고생했다"는 말을 건네자, "아직 안 끝났습니다. 또 다른 재판이 남아 있습니다"라고 말한 사람이 있었다. 최 전 실장이다. 그는 회사 내 급식 문제로 또 다른 재판을 받고 있다. 10년으로도 끝나지 않는 재판은 '죽음과 같은 늪'이라는 말이 실감나게 한다.
이재용 회장도 마찬가지다. 2014년 5월 10일, 선친인 이건희 선대 회장이 쓰러진 후 정작 본인은 제대로 된 경영을 펼쳐볼 기회도 없이 감옥과 법정에서 10년을 보냈다. 일부 단체들은 다시 '유전무죄, 무전유죄'를 외치며 이번 판결의 부당성을 주장하며 계속 이의를 제기할 것이다. 이들에게 딴지만 걸지 말고 재판 과정에서 나온 양측의 증거와 반증들을 면밀히 살펴보라고 권하고 싶다.
그러는 동안 지난 10년간 세상은 완전히 변했다. 이제는 AI(인공지능)와 양자컴퓨팅의 시대가 도래하고 있다. 삼성은 인적 쇄신을 포함해 완전히 바꿔야 한다. 사법적 족쇄에서 풀려난 이 회장에게 이제 삼성 구성원들은 "어디로 가야 하는가?"를 묻고 있다. 기업 총수의 자리는 많은 사람의 의견을 듣고, 결국 결정은 혼자 내려야 하는 위치다. 좌고우면할 시간이 없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 이 회장에게 전하고 싶은 법어(法語)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