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L] [준비안된 한일 경제전쟁]대법원 "개인 권리를 국가가 대신 포기하려면 조약상 명확한 근거 필요"…한일 청구권조약엔 없었다

국가들 사이에 맺는 '조약'을 통해, 국민의 청구권을 소멸시킬 수 있을까. 우리 대법원은 지난해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전범기업을 상대로 낸 위자료청구소송 전원합의체 판결에서 '그렇다'고 판단했다. 김소영, 이동원, 노정희 대법관이 제시한 별개의견을 통해서다.
앞서 지난해 내려진 대법원 전원합의체의 핵심 쟁점은 한일 양국이 국교정상화 과정에서 1965년 6월 22일 맺은 대한민국과 일본국간의 재산 및 청구권에 관한 문제의 경제협력에 관한 협정(이하 청구권협정)에서, 대한민국 국가가 아닌 개별 '국민'이 갖는 손해배상청구권 역시 청구권협정의 규율대상에 포함되는지 여부였다.
청구권협정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재산, 권리 및 이익으로서 본 협정의 서명일에 타방체약국의 관할하에 있는 것에 대한 조치와 일방체약국 및 그 국민의 타방체약국 및 그 국민에 대한 모든 청구권으로서 동일자 이전에 발생한 사유에 기인하는 것에 관하여는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여기엔 한국 '국민'의 손해배상청구권도 포함된다고 해석할 경우, 강제징용 피해자들은 청구권을 주장할 수 없게 된다.
대법원은 별개의견에서 한일 청구권협정 및 그에 관한 양해문서 등의 문언, 청구권협정의 체결 경위나 체결 당시 추단되는 당사자의 의사, 청구권협정의 체결에 따른 후속 조치 등의 여러 사정들을 종합해 "강제동원 피해자의 손해배상청구권은 청구권협정의 적용대상에 포함된다"고 판단한다. 즉, 국가간 조약으로 국민의 청구권을 제한 또는 소멸시키는 것이 원칙적으로 가능하다고 본 것이다.
대법원 별개의견은 그러나 "강제징용 피해자들이 여전히 청구권을 주장할 수 있다"고도 판단했다. 조약으로 청구권 제한이 가능하기는 하나, 국가가 개인의 청구권을 포기 내지 소멸시키려면 그에 대한 명확한 근거가 필요한데 청구권협정은 그 문언상 개인청구권 자체의 포기나 소멸에 관하여는 아무런 규정도 두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개인이 갖는 청구권의 제한을 인정하기 어렵다는 이유에서다.
대법원은 "협정을 통해 국가가 '외교적 보호권(diplomatic protection)', 즉 '자국민이 외국에서 위법·부당한 취급을 받은 경우 그의 국적국이 외교절차 등을 통하여 외국 정부를 상대로 자국민에 대한 적당한 보호 또는 구제를 요구할 수 있는 국제법상의 권리'를 포기하는 것에서 더 나아가 개인의 청구권까지도 완전히 소멸시킬 수 있다고 보려면 적어도 해당 조약에 이에 관한 명확한 근거가 필요하다"고 봤다.
대법원은 "청구권협정에는 개인청구권 소멸에 관하여 한일 양국 정부의 의사합치가 있었다고 볼 만큼 충분하고 명확한 근거가 없는 점 등에 비추어 갑 등의 개인청구권 자체는 청구권협정으로 당연히 소멸한다고 볼 수 없고, 청구권협정으로 그 청구권에 관한 대한민국의 외교적 보호권만이 포기된 것에 불과하다. 따라서 갑 등은 여전히 대한민국에서 신일철주금을 상대로 소로써 권리를 행사할 수 있다"고 판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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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법원은 권리의 '포기'를 인정하려면 그 권리자의 의사를 엄격히 해석하여야 한다는 법률행위 해석의 일반원칙에 의할 때, 개인의 권리를 국가가 나서서 대신 포기하려는 경우 이를 더욱 엄격하게 보아야 한다고 강조했다.
대법원은 "청구권에 관한 문제가 ‘완전히 그리고 최종적으로 해결된 것이 된다’는 표현이 사용되기는 하였으나, 위와 같은 엄격해석의 필요성에 비추어 이를 개인청구권의 ‘포기’나 ‘소멸’과 같은 의미로 보기는 어렵다"면서 "연합국과 일본 사이에 1951. 9. 8. 체결된 샌프란시스코 조약에서 “연합국은 모든 보상청구, 연합국과 그 국민의 배상청구 및 군의 점령비용에 관한 청구를 모두 포기한다'라고 정해 명시적으로 청구권의 포기(waive)라는 표현을 사용한 것과 구별된다"고 판단했다.
별개의견은 따라서 한일청구권협정의 문언상 의미가 명확하지 않은 이상 청구권협정에서 사용된 '해결된 것이 된다'거나 주체 등을 분명히 하지 아니한 채 '어떠한 주장도 할 수 없는 것으로 한다'는 등의 문언은 의도적으로 사용된 것으로 보아야 하고, 이를 개인청구권의 포기나 소멸, 권리행사제한이 포함된 것으로 쉽게 판단하여서는 안 된다는 결론을 냈다.
현행 헌법은 국가안전보장·질서유지 또는 공공복리를 위하여 필요한 경우에 한해 국민의 권리를 법률로 제한할 수 있고, 국회의 동의를 얻은 조약 등은 국내법과 같은 효력을 가진다고 규정하고 있다. 결론적으로 국가간 조약에 의한 국민 권리의 제한, 소멸도 원칙적으론 가능하다.
다만 국민의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서 근거되는 법률이 명확성과 구체성을 띄어야 하는 것처럼, 조약을 통해 국민 권리를 제한하기 위해선 법률과 동일한 수준으로 명확하고 구체적이어야 한다는 게 대법원의 입장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