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베테랑]보이스피싱 당한 노부부 피해 막은 9년차 경찰

"삑 삐익 삐익"
지난해 11월12일 오후 4시30분쯤 20평 남짓한 충청남도 아산경찰서의 112종합상황실에서 경보가 귀청이 떨어질 듯 울렸다. 경찰의 신고 분류 등급 중 두번째로 높은 코드원 신고였다.
모르는 사람이 현관문을 두드리는 등 위급한 상황에 코드원이 적용된다. 하루에 20~30건씩 들어오지만 상황실에 9년간 근무한 이종석 경위는 무언가 다른 점을 느꼈다. 접수한 신고는 줄글로 약 20줄 분량이었다. 보통 코드원 신고는 2~3줄 분량으로 짧다.
신고 내용을 들여다봤다. 충남 공주시에 사는 한 70대 노부부가 '아들을 감금하고 있으니 돈을 보내라'는 말에 속아 보이스피싱 수금책에 4000만원을 전했다. 노부부는 수금책이 탄 택시를 뒤쫓아 차량 번호를 받아적고 경찰서로 향했다. 충남 공주경찰서는 차량 번호를 조회해 택시 회사를 찾았고, 운전기사의 휴대폰 번호까지 알아냈다. 택시의 목적지는 KTX가 다니는 천안아산역이었다.
택시는 아산경찰서의 관할 지역을 지나고 있었다. 이 경위는 신고 내용 중 '4000만원' '택시' '천안아산역'이 눈에 들어왔다. 이 경위는 곧바로 무전기를 들고 순찰차에 천안아산역으로 출동하라고 지시했다. 몸에 익은 대처였고 모든 과정에 걸린 시간은 5초였다.

무전기를 내려놓은 이 경위는 사무실 전화기를 집어 들었다. 순찰차가 역에 도착하려면 5분이 필요했다. 택시의 속도를 늦춰야 했다, 이 경위는 "택시 기사들은 보통 휴대폰의 화면을 손님 쪽으로 고정하지 않나"라며 "화면에 '112'가 뜨지 않도록 일부러 사무실 전화를 사용했다"고 말했다.
문제는 하나 더 있었다. 택시 기사들은 대부분 운행 중 전화를 받을 때 스피커폰을 쓴다. 이 경위는 "전화기에다 내가 '경찰입니다'라 하면 자칫 뒷 좌석에 앉은 수금책도 경찰이 쫓는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 아닌가"라며 "경찰 신분을 숨길 전략이 필요했다"고 말했다.
순간의 판단이 중요했다. 택시기사가 전화를 받자 이 경위는 "형님"이라 인사했다. 자신이 택시기사와 아는 사람인 척 수금책을 속이려는 이 경위의 전략이었다.
다행히 택시 기사와 이 경위의 손발이 맞았다. 택시 기사는 "그려"라고 답했다. 목소리가 차분했다. 이 경위는 "손님 모시는 중인가 봐요"라며 대화를 이어가다가 "도착까지 얼마나 남았어요"라 물었다. 기사는 "2~3분 남았다"고 답했다.
이대로라면 택시가 순찰차보다 먼저 역에 도착한다. 이 경위는 "(역을) 한바퀴 돌아주면 안될까요"라 물었다. 수금책을 차에 1~2분만 더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다. 기사는 "안 될 거 같은데"라며 "솔직히 좀 무섭다"고 덧붙였다. 뒷 자석에 앉은 수금책이 택시기사에 해코지할 수도 있는 상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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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경위는 이대로 수금책을 놓치는 듯 싶었다. 하지만 이 경위도 모르는 사이 택시와 순찰차의 거리는 좁혀져 있었다. 택시 기사는 이 경위와 전화하는 동안 속도를 조금씩 줄였고, 상황실에서 이 경위의 동료는 순찰차에 "상황이 급하다"고 무전을 보냈다. 순간 전화 너머로 싸이렌 소리가 들렸다. 이 경위는 "빨리 차에서 내려서 순찰차에 손을 흔들라"고 외쳤다. 급하게 차 문을 여는 소리, 현장 경찰관들이 "움직이지 마"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다. 5분 간 이어진 추격전의 끝이었다. 경찰은 수금책을 현장에서 검거했고 노부부의 4000만원도 회수했다.

이 경위는 그날의 대처가 9년 동안 상황실에 근무한 '경험의 결과'라 설명한다.
이 경위는 "당시 대처한 내용 모두 교육 받을 때 책에 나오는 내용"이라며 "긴급 사건이 발생하면 이동로에 순찰차를 배치하는 건 기본"이라 말했다.
그러면서도 "하지만 교육을 받더라도 당장 사건이 떨어져 시간이 5분 밖에 없고 택시가 어디를 지나는지 등 모르는 부분이 많을 때 제대로 대처하는 건 쉬운 일이 아니다"라며 "경험이 많은 부분을 채워준다"고 말했다.
이 경위는 상황실에 5년 이상 장기 근무하는 '베테랑 근무자'를 키운다면 급박한 상황에도 순발력으로 사건을 해결하는 사례가 늘 것이라 기대했다. 그는 "경찰에는 한 부서에 5년 동안 근무하면 다른 부서로 발령하는 규정이 있다"며 "'112 상황실 근무자는 장기 근무를 유도하라'는 경찰청 내부 규칙이 있지만 이외에 장기 근무를 늘릴 방법을 찾는 것도 중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