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조금 줄게" 당근 뒤 '설비공개' 족쇄…삼성·SK 골머리

"보조금 줄게" 당근 뒤 '설비공개' 족쇄…삼성·SK 골머리

오진영 기자, 이재윤 기자
2023.03.04 07:00

[MT리포트]美기술 패권주의 시대…K반도체의 '생존 해법' 上

[편집자주] 미국이 반도체 중심으로 기술패권주의 전략 펼치면서 한국 기업들이 직접적인 영향권에 들었다. 지난달 28일 발표된 미국 상무부 인센티브 방안에는 한국기업에 '독소조항'이 될 수 있는 요건들이 많다. 중국 투자금지 이외에도 민감한 기술정보와 재무자료까지 요구해 미국 내에서도 지나치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미국 연방정부를 상대로 조건을 조율하기엔 민간 기업들은 협상력이 부족한 상황이다. 인센티브를 신청하지 않을 경우 미국의 제재를 받을 수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한마디로 '진퇴양난'이다. 정부차원의 지원이 절실할 뿐 아니라, 중장기적 생산설비 다변화 등 전략수정이 불가피하다. 한국의 주력 산업 반도체, 난관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 지 짚어본다.

미국 내부조차 "선 넘었다"…삼성·SK 반도체에 재갈물리기

"당초 예상보다 너무 까다롭고, 한국 반도체 기업 입장에선 가혹할 정도입니다."

"조 바이든 대통령식 자국주의가 본색을 드러낸 것 같다는 얘기까지 나옵니다."

"미국의 자신감은 알겠어요. 그래도 한국 기업의 처지를 이용하는 건 잘못됐죠."

국내 반도체 업계의 반응은 냉담했다. 지난달 28일 공개된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이하 반도체법) 얘기다. 미국 내 반도체 생산기업에 390억 달러(약 51조원)를 주겠다는 달콤한 제안에 숨겨진 무시무시한 독소조항 탓이다. 미국은 한국 반도체 기술도 모자라서 가계부까지 내놓으라고 압박하고 있다. 선택의 기로에 놓인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머리가 복잡하다.

3일 반도체 업계에 따르면, 국내 주요 업체들은 미국의 반도체법 가드레일(안전장치)이 공개되면서 대책마련에 분주한 모습이다. 이번에 나온 75쪽 분량의 자금조달 지원공고(NOFO)는 지원절차와 기준 등을 다룬 사전 신청서(Statements of interest)로, 이달 말까지 제출해야 한다. 주관은 미국 상무부와 표준기술연구소(NIST)다.

삼성전자 관계자는 "최대한 회사에 이익이 되는 쪽으로 검토하고 있다"고 말했다.

본 접수에 앞서 굵직한 가드레일 방향을 담은 사전 신청서는 국내 반도체 업계를 혼란에 빠뜨리기엔 충분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들은 한 목소리로 "기준이 너무 지나치다"고 입을 모았다. 미국 현지에서도 과도하게 자국 중심적인 기준을 지적하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다. 미국 월스트리트저널(WSJ)은 사설에서 반도체법을 "좌파정책을 강요하는 도구"라고 평가했다.

주요 심사기준은 크게 6가지로 △경제·국가 안보 △사업 상업성 △재무 건전성 △기술 준비성 △인력 개발 △사회공헌 등이다. 이 중 독소 조항으로 지목되는 기준은 초과이익 환수와 예상 현금(기대수익)흐름 제공, 국방·안보용으로 쓰이는 첨단 반도체 시설 접근권 등이다. 보조금으로 지어지는 생산설비는 미국산 재료를 사용해야하고,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원) 이상을 받으면 보육시설도 지어야 한다.

반도체 업계는 일부 독소조항으로 보조금 효과가 반감되고, 오히려 손해까지 볼 수 있다고 지적한다. 보조금보다 큰 금액을 환수 당할 수 있고, 영업비밀로 지켜져야 할 기대수익까지 공개해야 할 수 있다. 국방·안보용으로 제한했지만, 보안이 생명인 반도체 공장을 개방해야 할 수도 있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당초 10년 간 중국 등의 추가 투자를 금지한다는 기준이 합리적으로 보일 정도"라고 말했다.

그렇다고 한국 기업들은 보조금을 거부하기도 어려운 처지다.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는 미국 현지에 공장을 추진 중인데, 이를 거부하게 되면 세금이나 인·허가 등 다른 문제로 트집이 잡힐 수 있기 때문이다.

반도체 업계는 남아있는 본 접수까지 미국 정부와 협상에서 최대한 유리한 협상을 이끌어 내는 것이 현실적 대처 방안이라고 본다. 주요 기업들은 미국 워싱턴 D.C.에 소통채널을 마련하고 대책을 강구하고 있지만, 당장 묘수를 기대하긴 어렵다.

초과 수익 토해내고 설비공개까지…美 반도체 보조금 '독배'
/사진 = 정서희 인턴 디자인기자
/사진 = 정서희 인턴 디자인기자

미국이 반도체지원법(칩스법)에 따라 자국 내 반도체 투자기업에 지원금을 지급하는 절차를 공개했다. 미국 상무부는 지난달 28일(현지 시간) 최대 수조원에 달하는 지원금의 지급 조건으로 자국 안보와 중국과의 디커플링(분리)에 협력하는 기업을 최우선하겠다고 밝혔다. 보조금을 받고자 하는 기업은 생산 설비는 물론 재무정보까지 공개해야 하며, 초과 수익의 일부를 미국 정부에 지불해야 한다.

국내 반도체업계와 전문가들은 이같은 법안이 지나치게 한국 기업의 이익을 침해하고 있다고 입을 모은다. 첨단기술을 확보해야 하는 반도체 업종 특성상 생산설비 공개가 기술 유출로 이어질 수 있고, 상세한 재무정보를 공개하는 조건이 정부의 과도한 개입이라는 지적이다. 국내 기업들이 높은 미국 의존도 때문에 섣불리 보조금을 포기할 수 없다는 점을 빌미로 무리한 요구를 한다는 목소리가 나온다.

박영준 전 서울대 전기정보공학과 교수는 "한국 정부도 국내에 투자하는 기업에 조건을 거는 경우가 있지만, (미국 반도체 지원법처럼) 일방적으로 국내 기업에 과도한 요구를 하는 것은 적합하지 않다"라면서 "생산·연구 설비나 투자계획 등을 공개하는 법안은 상호 호혜적인 입장에서 볼 때 형평성에 어긋난다"라고 지적했다.

특히 초과수익을 회수하겠다는 내용이 부담이라는 지적이다. 1억 5000만 달러(한화 약 2000억원) 이상의 반도체 지원금을 받는 기업은 예상을 초과하는 이익이 발생했을 경우 보조금의 최대 75% 범위에서 미국 정부에게 이익금을 반납해야 한다. 미국이 지급하기로 한 보조금 527억달러(약 67조원)를 기준으로 계산하면 최대 75%인 395억 달러(약 51조원)를 도로 지불해야 하는 셈이다.

국내 반도체기업 관계자는 "보조금과 대출 등을 포함하면 수조원이 넘는 지원금을 받는데, 초과이익이 발생할 때마다 미국 정부에 이를 반납해야 한다면 법인세 등 각종 세금을 포함해 천문학적인 돈을 토해내야 할 것"이라며 "삼성이 파운드리, SK하이닉스가 후공정 공장을 미국에 건설 중인데 이번 보조금 법안은 국내 기업들에게 득보다는 실이 클 것"이라고 우려했다.

재무 건전성을 검증할 수익성 지표와 예상 현금흐름 전망치 등 상세한 재무정보를 공개해야 한다는 점도 문제다. 홍기용 인천대 경영학과 교수는 "기본적인 수준의 회계정보를 제공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투자 규모와 운영 계획, 생산설비까지 공개하라는 것은 기업의 부담이 너무 크다"라며 "수율·생산 효율을 담은 내용이 미국 정부에 넘어갈 가능성이 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나 업계는 국내 기업들이 미국 반도체 시장의 의존도가 높기 때문에 섣불리 '미국 패싱'을 시도할 수 없다고 토로한다. 업계 관계자는 "미국이 보유한 반도체 원천기술이나 장비, 수요를 고려하면 미국 내 투자는 선택이 아닌 필수"라며 "섣불리 보조금을 거부했다가 미국 정부의 눈 밖에 날 우려가 있어 선택권이 없는 외국 기업에게 생색은 생색대로 내면서 실리까지 챙기려는 것 같다"라고 말했다.

홍 교수는 "미국의 반도체 패권 확보를 위한 움직임이 지속될 것으로 보이는 만큼 정부와 기업이 전략적으로 접근할 필요가 있다"라며 "단순히 손익계산 차원을 벗어나 미국이 재편하는 공급망에서 이탈하지 않으면서도 손실을 최소화하는 대응이 필요하다"라고 제언했다.

"솟아날 구멍 있다"…K반도체 '스마트 전략·외교 지원' 필요
반도체 칩을 들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AP=뉴시스
반도체 칩을 들고 있는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AP=뉴시스

G2(미국·중국)의 힘겨루기 사이에 끼인 한국 반도체 업계가 쓸 수 있는 대책은 이른바 '양다리 전략'이다. 미국의 반도체 지원법(CHIPS Act·이하 반도체법)에 포함된 가드레일(안전장치) 협상을 최대한 유리하게 이끌어 내면서도 세계 경제의 다른 한 축인 중국과 관계도 이어가야 한다. 반도체 업계는 미국 정부를 상대로 개별 기업이 의미있는 협상력을 갖기 어려운 만큼 외교적 지원 또한 뒷받침 돼야 한다고 강조한다.

3일 업계에 따르면 한국 반도체 기업들은 미국의 보조금 신청을 최대한 늦출 전망이다. 최대한 시간을 벌어 상황을 지켜본 뒤 보조금을 신청하겠다는 현실적인 전략이다. 미국은 지난달 28일 가드레일을 공개하면서 사전 신청서 접수를 시작했고, 본 신청은 이달 31일부터 받는다. 한국 기업으로는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가 보조금 신청을 준비하고 있다.

중국에 주요 생산공장을 가동하고 있는 가운데, 미국의 보조금도 포기할 수도 없는 한국 기업들은 어느쪽도 포기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시간을 끄는 것 말고, 현재로선 방법이 없다"고 말했다. 반대로 보조금을 신청하지 않으면, 세금이나 인·허가 등 현지에서 트집이 잡힐 수도 있다. 삼성전자는 미국 텍사스주에 파운드리 공장을 건설중이다. SK하이닉스는 투자계획만 공개했다.

업계는 미국 상무부의 보조금 가드레일이 공개되면서 셈법은 더 복잡해진 만큼 정부의 외교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강조한다. 지난달 28일 공개된 가드레일에는 한국 기업에 치명적인 일부 독소조항이 포함됐다. 당초 중국과의 기술 패권 다툼에서 우위를 점하려는 목적에 한국까지 동참시키려는 의도로 풀이된다. 반도체 업계에선 이를 두고 미국에 '뒤통수를 맞았다'는 평가까지 나온다.

주요 독소 조항으로 지목되는 기준은 초과이익 환수와 예상 현금(기대수익)흐름 제공, 국방·안보용으로 쓰이는 첨단 반도체 시설 접근권 등이다. 보조금으로 지어지는 생산설비는 미국산 재료를 사용해야하고, 1억5000만 달러(약 2000억원) 이상을 받으면 보육시설도 지어야 한다. 구체적인 초과 이익환수 비율과 기대수익 제공범위 등은 협상에 따라 달라질 수 있다.

390억 달러(약 51조원) 규모 보조금을 빌미로 감당해야 할 무게치고는 과도하다는 게 반도체 업계의 지적이다. 반도체 업계 관계자는 "최대한 유리한 상황을 만들 수 있도록 노력하겠지만, 미국 정부를 상대로 개별 기업이 대응하는 건 한계가 있다"고 말했다. 또 다른 관계자도 "가드레일 예외적용을 받을 수 있도록 정부차원에서 외교적 지원이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당장 미국과 중국의 눈치를 살피면서도, 중·장기적인 관점에서 반도체 생산시설을 '안전지대'로 이전해야 한다는 지적도 있다. 중국에 있는 반도체 생산시설을 국내나 미국에 우호적인 제3국 등으로 옮기는 대안이다.

김양팽 산업연구원 전문연구위원은 "중국 공장에서 지금보다 높은 수준의 반도체를 생산하는 건 어려울 수 있다"며 "첨단 제품은 국내에서 생산을 추진하는 등 고민을 해야할 것"이라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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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진영 기자

안녕하세요. 정책사회부 오진영 기자입니다.

이재윤 기자

안녕하세요. 스토리팀 이재윤 기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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