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미국과 중국의 대결 구도에서 동남아시아보다 집중적인 압력을 받게 된, 혹은 더 많은 것을 잃을 수도 있을 지역은 그리 많지 않다. 거의 7억 명이 살고 있는 이 지역은 중국의 영향력 확대의 실험장으로 여겨지곤 한다. 베이징은 동남아시아를 종종 자국의 "주변부"로 부르곤 한다. 또한 일대일로 이니셔티브 하에 동남아시아에 다양한 기반 시설을 건설하는 동시에 동남아시아 해역에 강한 군사적 존재감을 쌓아가고 있다. 워싱턴은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중국 주도 프로그램에 동의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큰 노력을 기울여 왔다. 심지어 중국산 시스템이 낮은 비용으로 경제 성장을 촉진하는데 도움을 줌에도 불구하고, 미국은 파트너와 동맹국들이 다양한 중국 기술 금수조치에 협조하기를 원한다.
동남아시아의 입장에서 볼 때 이 요구들은 너무나 친숙하게 느껴질 수밖에 없다. 냉전 기간동안 동남아시아 지역은 소련과 미국 (그리고 나중에는 중국이) 패권을 두고 다투었던 거대한 투쟁의 주요 무대가 되어 있었다. 그 경쟁과 폭력으로 정규전, 내전, 체계적인 국가 폭력이 저질러졌고 수백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동남아시아 사람들은 그 시절을 따스한 마음으로 추억하지 않는다. 그것을 되풀이할 생각은 더더욱 없다.
중국의 경제력에도 불구하고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워싱턴의 중국 봉쇄 전략에 의존하지 않고도 중국의 지배 시도에 저항할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워싱턴에 의존하는 대신 동남아시아 국가연합(ASEAN), 즉 아세안을 중심으로 한 다자기구들을 설립하고 강화함으로써 스스로 독립적인 힘을 가질 수 있었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이 중국이나 미국과 관계를 강화한다면 그것은 스스로의 판단과 실행에 따른 것이다.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미중 경쟁을 자신들의 이익에 맞도록 활용하며, 두 강대국을 경쟁시켜 동남아시아의 경제적 이득이 되게끔 하는 방법을 익혀 왔다. 동남아시아는 강대국들을 한데 불러모을 수 있는 외교적 힘을 갖게 되었다.
하지만, 동남아시아가 현재의 입장을 유지할 수 있을지는 미지수다. 베이징과 워싱턴의 긴장이 군사적 충돌로 이어진다면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어느 한쪽을 택하라는 강한 압박을 받게 될 것이다. 동남아시아는 한 덩어리로 움직이는 단일한 무언가와 거리가 먼 지역이다. 하지만 동남아시아의 빠른 성장과 커져가는 경제 규모는 동남아시아 각국이 해가 갈수록 더 강한 나라가 될 것임을 예상케 하며, 그러한 경제력에 힘입어 시간이 지날수록 외부로부터의 간섭을 막아낼 수 있는 힘을 갖게 될 것이다. 한때 강대국의 분쟁지로 여겨졌던 동남아시아는 오늘날 강대국 갈등을 조절하는 역할 모델이 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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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시아는 늘어나는 긴장감 속에서 조심스럽게 행보를 택해 왔다. 2019년 아세안은 미국의 공격적인 인도 태평양 전략에 대한 응답으로 "인도 태평양 전망"이라는 백서를 발간했다. 동남아시아 지역에서의 제로섬 경쟁을 지양하며 그 어떤 단일한 강대국에 지배적 지위를 허용하지 않겠다는 점을 명확히 했다. 백서는 지역 정치외교의 중심에 강대국 대신 아세안을 올렸다. 아세안은 스스로를 격상시킨 셈이었는데, 이후 그것을 실행에 옮겼다. 지난 수십 년간 동남아시아 국가들은 외부의 투자를 끌어들였고 역외와의 교역을 확대했다. 아세안은 자신들의 외교 원탁 회의에 다른 나라들을 끌어들임으로써 동남아시아 지역 정치에 있어서 객체가 아닌 주최측의 입지를 다져 왔다. 예컨대 '아세안 플러스 국방장관회의'는 아세안의 10개 회원국에 더해 중국, 러시아, 미국 등 다른 나라의 국방장관을 한데 불러모아 지역과 국제적 사안을 논의하는 자리다. 외부에 문을 여는 이 회의의 독특한 다자주의가 미국인들로서는 선뜻 와닿지 않는 듯하다. 미국인들은 세계를 친구와 경쟁자로 나눠 보는 경향이 강한데다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엔 이 경향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모든 이들과 협력하는 것은 그 어떤 적도 만들지 않기 위한 좋은 방법일 것이다.
동남아시아는 외교와 안보의 영향력을 유지하고 확대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여 왔다. 아세안이 주도하는 다자 안보체제 하에서 동남아시아는 외부 국가들과 여러 다자 혹은 양자 협약을 맺어 왔다. 중국, 라오스, 미얀마, 태국이 함께 메콩강을 순찰하는 비상설 그룹 같은 것을 사례로 꼽아볼 수 있다. 싱가포르와 말레이시아가 호주, 뉴질랜드, 영국과 맺었고 50년도 더 된 5개국 방위 협정 같은 제도적 합의 좋은 사례다. 지정학적 환경이 열악해짐에 따라 이미 많이 도입되어 있는 이런 종류의 파트너십은 숫적으로 더욱 늘어날 전망이다. 복잡하고 때로는 중첩되는 다양한 외교협정들은 모든 나라와 관계하되 특정국과 독점적 관계를 맺지 않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동남아시아에게 그 목적의 달성을 위해 필수적이다.
동남아시아의 균형 외교가 영원히 통할 것이라는 보장은 어디에도 없다. 미중 경쟁이 치열해짐에 따라 많은 분석가들은 동남아시아 국가들 역시 언젠가는 한쪽 편에 서야 할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 심지어 싱가포르의 지도자인 리셴룽 역시 베이징과 워싱턴의 대결 구도를 전혀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지만, 2018년 아세안 정상회의에서 언젠가 아세안 역시 어느 편에 서야 할지 정해야 할 것이라고 말했다.
하지만 지금은 냉전과 사정이 다르다. 당시 동남아시아는 대부분 가난하고 갓 독립한 약한 국가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오늘날 아세안 국가들은 경제적으로 대개 중진국 수준에 있으며 동남아시아의 외교가 보여주고 있다시피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다가올 미래에 동남아시아 국가들의 경제력은 그 인구와 마찬가지로 더 늘어날 것이다. 경제력과 인구의 증가는 베이징과 워싱턴 모두가 결여하고 있는 것이다. 중국의 인구는 줄어들고 있으며 미국은 국내 정치의 양극화로 인해 경제 성장 및 리더십 역량 확충에 있어서 난관을 겪을지 모를 상황이기 때문이다. 경쟁 관계에 있는 두 국가는 향후 수십여년간 상대적인 국력 약화를 겪게 될 것인데, 이는 미중 양국과 아세안 국가들 사이에 벌어져 있는 힘의 간극을 좁히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
실제로 다가올 수십년은 동남아시아 지역이 국제적으로 앞서갈 수 있는 시기가 될 것이다. 국제통화기금(IMF)은 동남아시아 권역이 향후 몇 년 간 세계 그 어느 곳보다 빠른 경제 성장을 기록할 것이라 예측하고 있다. 만약 세계 경제가 불황을 겪게 된다면 동남아시아가 아시아-태평양 권역의 성장을 이끌게 될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제1위 인구대국 인도네시아와 제3위 인구대국 베트남은 20년 후에 선진국의 반열에 오르기 위한 행보를 밟고 있다. 그때가 되면 동남아시아의 세계적 영향력 역시 확연히 늘어날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전략은 '비동맹'이 아니라 '다동맹'으로 이해되어야 마땅하다. 동남아시아는 맺을 수 있는 한 많은 관계를 맺고 많은 선택지를 확보하려 한다. 중국과 미국 뿐 아니라 호주, 인도, 일본, 유럽 국가들 역시 동남아시아 지역과 무역, 투자, 국제 대화 참여 등에 적극적으로 함께하기를 바라고 있다. 이 모든 연결고리를 만드는 일에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하다. 동남아시아의 경우가 잘 보여주듯이, 개발도상국들이 강대국들의 갈등을 피하면서 스스로 국제 무대의 주도적 선수가 되는 것은 효과도 좋고 충분히 가능한 전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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