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동희의 사견(思見)]

새해가 밝았지만 기업인들의 표정은 그렇게 밝지 못하다. 새해 첫달의 3분의 2가 지났지만 올해 한국 경제 성장에 대한 자신감은 보이지 않는다. 다들 긴축을 말하는 것을 보면, 위축됐다는 뜻이다.
최근 만난 A 기업 고위 임원에게 올해 사업 계획의 변경 여부를 물으니 "사업 계획대로 안한 지 한참 됐다"고 말한다. 지난해 11월경 A 그룹 총수와 계열사 CEO(최고경영자)간에 서로 논의했던 '2025년 사업계획'은 무의미해졌다고 한다.
위헌 논란의 12.3 비상계엄령을 시작으로 한 정치적 격변으로 사업계획에서 예상했던 환율범위를 훨씬 벗어나면서 당초 사업목표가 무색하게 됐다. 3조원 정도의 합작 투자를 하기로 했던 B국가의 국영기업은 계엄령(Martial Law) 선포 직후 "3개월만 투자를 홀딩하자"고 브레이크를 걸었다.
국제정세의 불안정성과 함께 국내의 정치적 혼란이 경제의 발목을 잡고 있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기업들의 시름도 깊어진다. 경제가 살아야 국민들의 삶이 편해지는데 그렇지 못한 게 현실이다.
연초 미국 라스베이거스에서 열린 국제가전전시회(CES) 2025에서는 전세계 기업들이 앞다퉈 AI(인공지능) 시대에 본격 몰입(Dive-in)을 이야기하는 데 국내 상황은 혼돈에 빠져 있다. 20일 취임식을 한 트럼프 대통령도 '농담'을 담았지만 한국을 혼돈상태로 언급하기도 했다. 정치 위기이자 경제위기 상황이다.
경제(經濟)라는 말은 원래 경세제민(經世濟民)에서 줄인 말이다. 그 뜻은 '혼란한 세상 일을 잘 다스려 어려움에 빠진 백성을 구제한다'는 것이다. 정치를 잘하면 기업활동이나 국가경제에 도움을 줘 백성의 구제가 쉽다는 얘기다. 백성의 먹을거리를 든든히 하는 것이 곧 경세이고 제민이다.
30년 전인 1995년 4월 이건희 삼성 회장이 중국 베이징 주재 한국특파원과 가진 기자간담회의 발언도 비슷한 얘기다. 당시에는 "한국의 기업은 2류, 행정은 3류, 정치는 4류다"라는 발언만 부각돼 곤욕을 치렀지만 핵심 내용은 제대로 된 정치와 행정이 있으면 경제는 더 쉬워진다는 점을 강조한 것이다.
장쩌민(江澤民) 중국국가주석을 만난 직후 이 회장은 당시 "반도체는 장 주석이 '몇 비트냐' 'R&D 비용은 얼마냐'고 물을 정도로 관심을 많이 갖는 분야인데, 우리는 반도체 공장 건설허가를 받으려면 (관공서에서) 받아야 할 도장이 1000개나 필요하다"며 "(중략)솔직히 얘기하면 우리나라는 행정력은 3류, 정치력은 4류, 기업경쟁력은 2류급"이라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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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와 행정이 기업과 기업인들에게 얼마나 더 애정 어린 관심으로 다가가느냐가 국가경쟁력을 좌우한다는 얘기를 했는데 이를 '정부 비판'으로 곡해되면서 이 회장은 그후 상당기간 입을 닫았다.
지금도 기업인들은 정치권들로부터 어떤 트집도 잡히지 않기 위해 몸을 사리면서 경영을 하고 있다. 정권이 바뀔 때마다 곤욕을 치른 트라우마 때문이다. 이는 비단 대한민국에서만의 일은 아니다. 새로 출범한 트럼프 2기 행정부를 보면 트럼프와 각을 세웠던 마크 저커버그 메타 창업자 등 많은 기업인들이 그에게 다시 머리를 숙이고 화해의 제스쳐를 취하고 있다.
보호무역주의를 기반으로 한 미국 우선주의에 속도를 내는 트럼프 정부에 맞서 우리 경제를 살리기 위해서는 내부적 안정이 그 무엇보다 절실하다. 양극단으로 치닫는 정치권의 역할인 '경세'는 그 스스로가 목적이 아니다. 백성을 구제하는 경제인들의 영역인 '제민'을 위한 수단이다.
정치적 안정이 기업성장의 발판이고, 경기회복의 디딤돌이다. 30년전 이건희 회장의 베이징 발언 때와 하나도 바뀐 게 없어 안타깝다고 하는 사람들도 있다. 하지만 더디지만 조금씩 전진해 왔던 우리의 저력을 믿고 위대한 극복을 해나가야 한다. 진영논리를 떠나 정치권과 정부는 경세제민의 정신으로 경제·민생 법안들은 조속히 처리해 예측가능한 대한민국을 보임으로써 트럼프 2기 시대를 준비해야 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