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년 전인 2005년 여름, 중국 칭다오의 해변에는 낯선 풍경이 펼쳐졌다. 얼굴 전체를 가리고 눈과 코, 입만 뚫린 독특한 마스크를 쓴 여성들이 바닷속을 헤엄쳤다. 자외선과 해파리의 공격으로부터 피부를 지켜주는 '페이스키니'(Facekini)였다. 얼굴(Face)과 비키니(Bikini)의 합성어로 불리는 이 마스크는 착용 모습이 '범죄자 같다'는 조롱에도 불티나게 팔렸고, 글로벌 패션 중심지인 이탈리아 등 유럽까지 진출했다.
서방 언론은 페이스키니를 여름철 이색 패션으로 꾸준히 소개하고 있다. 업계 전문가들은 계속된 폭염으로 인한 자외선 노출 문제로 페이스키니가 다시 주목받고 있고, 기후변화 위기 시대에 페이스키니가 새로운 패션 문화로 자리 잡을 수도 있다고 말한다.
'페이스키니'는 남편과 함께 수영용품을 판매하던 전직 회계사 장스판의 손에서 탄생했다. 당시 장스판은 해변을 찾은 손님들에게 어떤 물건을 팔지 고심하던 중 자외선과 해파리에 힘들어하는 피서객을 위한 제품을 직접 제작하는 계획을 세웠다고 한다. 그는 2004년 초 잠수부의 모자 '다이빙 캡'을 참고로 얼굴 전체를 가리는 나일론 소재의 마스크를 제작했다.

장스판이 만든 마스크는 2005년부터 소량으로 첫 판매를 시작한 뒤 중년 여성들을 중심으로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2006년부터는 대량 생산에 나섰다. 마스크를 쓴 중년 여성들이 바다에서 유유히 수영하는 모습이 중국 소셜미디어(SNS)에서 급속도로 확산하자 서방에서도 관심을 보였다.
2012년에는 '페이스키니'라는 용어가 처음 등장했다. 당시 로이터통신은 칭다오 해변에서 페이스키니를 쓴 중년 여성 사진 시리즈를 공개하기도 했는데, 해당 사진들은 타임지가 선정한 '2012년 가장 충격적인 사진 30장' 중 하나로 선정되기도 했다. 2014년에는 프랑스 패션 잡지 표지에 등장해 '해변 패션'에서 '런웨이 아이템'으로 급부상했다.
2016년 유럽에서 불거진 '부르키니'(Burqini) 착용 금지 논란으로 페이스키니의 인기는 더 높아졌다. 2019년 팝스타 리한나는 페이스키니를 착용한 화보를 공개했고, 같은 해 밀라노 패션위크에는 페이스키니를 쓴 모델들이 등장하기도 했다. 부르키니는 무슬림 여성을 위한 수영복의 일종으로 부르카(Burqa)와 비키니의 합성어다.

페이스키니 역시 다른 인기 제품들처럼 '가짜 제품', 코로나19 팬데믹 등으로 위기를 겪었다. 치솟는 인기에 중국 내 가짜 제품이 쏟아져 나오면서 품질 문제가 불거졌다. 팬데믹 기간 중국 당국의 지역 봉쇄로 해변을 찾는 사람이 사라지면서 페이스키니에 대한 관심도 역시 추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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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최근 기후변화로 인한 폭염과 자외선 노출 문제가 심각해지면서 페이스키니가 중국에서 다시 주목받고 있다. 과거 '수영용품'으로 제한됐던 페이스키니의 사용 용도가 자외선에 장시간 노출되는 낚시, 사이클링, 등산 용품으로 확대돼 다양한 소비층이 페이스키니를 찾기 시작했다.
스위스 공영방송 SRF는 최근 '중국의 자외선 차단 트렌드'를 소개하며 "과거 중국 해변에 등장했던 페이스키니가 베이징 등 중국 주요 도시 시내에서도 포착되고 있다"며 "갈수록 심해지는 더위에 점점 더 많은 여성이 페이스키니를 찾고 있다"고 보도했다. 스페인 TV 채널3도 "중국의 여름 패션 아이템 '페이스키니'가 최근 스페인에서도 인기를 얻고 있다"며 "이 제품은 5유로(약 8100원)라는 저렴한 가격으로 자외선으로부터 피부를 보호할 수 있다"고 전했다.

중국 시장조사업체 다쉐 컨설팅의 레이밍은 최근 영국 경제 주간지 이코노미스트에 "소비자들이 이제는 해변에서 쓰는 페이스키니를 넘어 사무실이나 야외에서 쓸 수 있는 제품을 원하고 있다"며 "이제 많은 여성은 페이스키니를 하얀 피부를 유지하는 데 도움이 되는 피부관리 과정의 일부로 여기고 있다"고 말했다. 다쉐 컨설팅에 따르면 지난해 중국 내 자외선 차단 의류 시장 규모는 800억위안(약 15조6000억원)에 달했고, 이 가운데 페이스키니 판매는 전년 대비 50% 증가했다. 최근에는 남성용·아동용 제품 판매도 늘고 있다.
한편 중국 현지에선 장스판의 끊임없이 제품 개발이 페이스키니를 일종의 패션 아이템에서 중국 문화의 상징으로 거듭나게 했다고 평가한다. 중국 매체 치루이뎬은 지난 7월 '페이스키니의 흥망성쇠'를 주제로 한 기사에서 "초기 제품은 그저 피부 보호를 위한 제품이었다. 하지만 시대의 흐름에 맞춘 장스판의 계속된 제품 개발로 이제 페이스키니는 얼굴 축소 등의 기능성과 경극, 손오공 캐릭터 등 중국 전통문화 디자인까지 접목돼 단순 '자외선 차단' 제품에서 '문화적 상징물'이 됐다"고 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