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실리콘밸리의 풍경이 바뀌고 있다. 몇 년 전까지 성과급 잔치로 전 세계 인재를 끌어모으던 빅테크 업체들이 최근 잇따라 지갑을 닫기 시작했다. 메타는 전사적 주식 보상을 성과 상위자 중심으로 재편했고 구글과 애플은 성과급 지급 시기와 횟수를 조절하면서 현금 흐름 통제에 나섰다. 직원을 아끼지 않아서가 아니다. 엔비디아 AI(인공지능) 칩을 하나라도 더 사고 데이터센터를 한곳이라도 더 짓지 않으면 순식간에 도태되는 '생존 전쟁' 때문이다. 한 쪽에 수십조원을 쏟아붓고 이를 위해 다른 쪽에선 허리띠를 졸라야 하는 냉혹한 리밸런싱(재배치)에 내몰리고 있는 것이다.
실리콘밸리의 이런 몸부림에 더 눈길이 가는 건 전혀 다른 방향으로 골머리를 앓고 있는 한국 기업들의 현실 때문이다. 삼성전자(299,500원 ▲23,500 +8.51%)가 그렇다. 성과급을 두고 터져 나오는 갈등과 잡음이 벌써 몇 해째다. 인재 유출을 막고 사기를 진작시키기 위해 보상을 더 해야 한다는 목소리와 당장 미래를 위한 재원을 비축하지 않으면 도태될지 모른다는 경영적 판단이 정면으로 충돌하는 모양새다. 올해는 반도체 생산라인 가동 중단 직전까지 치닫다 지난 20일 파업 돌입을 불과 1시간 반 앞두고 협상이 타결됐다. 노사가 가까스로 파업 시계는 멈춰 세웠지만 성과급이 그 자체로 목적이 된 듯한 씁쓸함이 진하다.
월급 통장에 더 많은 숫자가 찍히는 걸 누가 마다하랴만 내부 갈등을 봉합하고 파업을 막기 위해 내준 성과급 때문에 미래 먹거리를 만들 투자가 위축된다면 그건 '제살 깎아먹기'나 다름없다. 눈앞의 성과급 잔치에 도취돼 샴페인을 터트렸다가 파국을 맞이한 기업들의 경고가 적잖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의 도화선이 됐던 미국의 4대 투자은행 리먼 브라더스가 대표적이다. 당시 리먼의 경영진과 트레이더들은 단기 모기지 채권 판매 실적에 치중해 매년 천문학적인 액수의 성과급을 나눠 가지면서 리스크는 방치했다. 회사가 파산 직전의 벼랑 끝으로 내몰리던 그 순간까지도 성과급 봉투는 두터웠다. 결국 탐욕의 끝은 전 세계 경제의 위기였다.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30여 년 전 창업 당시부터 "우리 회사는 망하기까지 딱 30일 남았다"고 말해왔다. 지금은 세계 시가총액 1위 기업 반열에 올랐지만 그는 여전히 한 순간의 안주가 몰락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위기의식을 강조한다. 그런 위기의식과 치열한 연구·투자가 지금의 엔비디아를 만들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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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삼성전자의 실적 개선은 어쩌면 엔비디아가 이끄는 글로벌 AI 투자 붐의 파도에 운 좋게 올라탄 덕일지도 모른다. 이런 시대를 내다본 선구안과 임직원들의 각고를 깎아내리려는 게 아니다. 기록적인 성과를 또다른 혁신의 발판으로 삼으려는 글로벌 기업들을 목도하면서 우리만 밥그릇 다툼에 매달려 있을 순 없다는 얘기다. 기업의 생존을 담보할 '투자의 비축'과 인재의 사기를 높일 '보상의 분배' 사이에서 적절한 선이 어디인지 좀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비전이 사라진 기업은 당장 성과급 몇 푼을 더 준다고 해도 인재를 붙잡을 수 없다. 침몰하는 배에서의 성과급이 아니라 세상을 바꿀 배에 탑승했다는 확신이 인재를 구한다. 등 떠밀려 미래를 담보로 성과 잔치를 이어간다면 그 끝은 모두가 함께 파선(破船)하는 길뿐이다. '망하기까지 30일 남았다'고 생각하는 실리콘밸리의 절박함을, 그리고 파업 직전에야 멈춘 노사갈등이 던진 숙제를 무겁게 받아들일 때다. 지금 실리콘밸리는 허리띠를 졸라매면서 미래를 사고 있다. 혁신은 보너스 봉투 안에서 절로 자라지 않는다.
